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흥숙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그는 1954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의 가난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박정렬(朴貞烈 또는 朴正烈)이다. 일설에 따르면 [[한부모 가정]]이라고도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그의 부모는 가난했고 도로변의 허름한 점포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형도 세상을 떠난 뒤부터 본래 가난했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고 한다. 그를 알던 주변 사람들은 그를 홀어머니와 남은 동생들을 잘 돌보는 효자였다고 기억했다. 박흥숙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그가 보였던 비상한 똑똑함과 또한 그가 겪었던 지독한 가난함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난으로 인해 가족이 흩어지면서 어머니와 막내동생은 절로 가서 수발을 들며 허드렛일을 하며 연명했고 그의 여동생은 남의 집의 [[식모]]로 일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박흥숙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의 최종 학력은 국민학교였다.[* 후에 20시간씩 공부해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사시를 준비했다.] 그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바라던 학교([[영광중학교(전남)|영광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우리집은 가난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며 당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겪고 있던 사정을 전했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에 광주시내에서 열쇠수리공으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인지 [[주경야독]]을 하여 다섯 달 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고 그의 여동생과 그의 일기는 증언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곧바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법관이 되면 가난을 벗어나 흩어진 가족들을 모아서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이때 그가 자신의 거처로 삼은 곳이 [[무등산]]이다. 그는 무등산 산자락으로 들어가서 움막집을 세우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다. 당시 무등산 자락 주변에는 20여 가구가 빈민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민들이 박흥숙과 그의 가족이 굶주림에 허덕이면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훗날 사건 이후 형성된 박흥숙을 동정하는 여론은 주로 이 주민들의 증언에서 기인했다. 박흥숙의 어머니 심금순(沈今順)은 산중턱에 있는 무당의 집에서 무당의 수발을 들고 허드렛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평소 체격이 작고 허약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여 [[구한말]] [[동학]]군 사이에서 읽히던 [[정도술]]이라는 무술책이 집안에서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그것을 수련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