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현주 (문단 편집) === 미래에셋 창업 === 1997년 6월 회사를 나와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국내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설립했다. 강남 본부장으로 승진하는 등 잘 나가던 도중 같은 강남 지역 본부의 젊은 지점장들(최현만, 구재상)과 함께 독립했다. 1997년에 미래에셋벤쳐캐피털과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시초로 1998년 미래에셋자산운용, 1999년 사이버증권사 E*미래에셋증권를 각각 설립했다. 창업 후 6개월 만에 IMF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위기는 곧 기회라는 생각과 함께 '''소수 전략''' 즉 다수가 가는 길을 따라가서는 큰 돈을 벌 수 없다며, 소수의 시각에서 투자를 바라보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인사이트와 한국 경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자 성과를 이끌었다. 벤처캐피털 시절 외환위기가 닥치자 가격이 급락한 채권에 투자해서 대박을 쳤고, 1998년 '박현주 1호 펀드'로 알려진 뮤추얼펀드를 출시하면서 수익률 90% 이상을 기록한 후 1999년 '바이코리아펀드'가 또 다시 시중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자 증시로 돈이 흘러들어 먼저 나왔던 펀드가 수익률이 올라가는 혜택도 봤다. '다음커뮤니케이션' 투자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테크버블이 불자 '다음커뮤니케이션'이 가치에 비해 주가가 너무 낮다고 판단하고, '다음' 주식에 24억을 투자했는데 '다음' 주식에서만 1,200억원을 벌어들이면서 초대박이 났다. 2000년대 초반 그 유명한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펀드를 출시한다. 그전까지의 펀드들은 폐쇄형 스팟형이라고 해서 몇명 돈많은 사람들한테서 돈을 모은 후 주식에 투자하고 일정 수익이 되면 환매하는 구조였다. 구조상 단기투자나 작전이 횡행했는데 펀드 환매일 근처가 되면 미리 알던 기관이나 외국인들이 시장을 폭락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지곤 했다.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는 공모형 개방형으로 누구나 투자할 수 있고 따로 환매일이 정해지지 않아 그 전 펀드들과는 차별점이 있었다. 이 펀드들을 계기로 소위 간접투자, 펀드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때마침 외환위기 졸업, 테크버블, 중국성장 등 테크트리를 제대로 타면서 2007년 호황시절에는 수익률이 1,000%에 육박한다. 적립식펀드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소액장기투자를 권장했고 이맘때 쯤 나온 펀드가 3억 만들기 시리즈. 은행들이 판매에 가세하면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국민은행에서만 단일 펀드시리즈가 판매잔고 1조 수준에 육박할 정도. 당시 증권사와 은행 지점들은 '우리도 미래에셋펀드 팔아요'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영업하는 등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당시만 해도 '펀드는 미래에셋'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였는데 문제는 이 미래에셋이 증권인지 운용인지 생명인지 일반인들은 잘 구분하지 못했고 생명사 가서 펀드에 가입하거나 보험 상품 클레임을 걸기 위해 증권사 지점을 방문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까지는 증권사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으로 펀드 판매창구로서의 역할일 뿐 실질적인 주도권은 운용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미래에셋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3억만들기 시리즈 성공 이후 중국 증시가 엄청난 폭등을 기록하면서 미래에셋차이나솔로몬을 위시한 중국 펀드들도 엄청난 수익을 기록한다. 이후 출시된 [[미래에셋 인사이트 펀드]]는 투자 대상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당시로선 특이한 형태의 펀드였는데 말하자면 주식, 채권, 원자재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투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서 잘하면 대박, 못하면 쪽박을 찰 수 있는 구조였다. 아무튼 이게 '박현주 펀드'로 마케팅되면서 시중자금을 단 3주 만에 4조 원 흡수하며 전무후무한 히트를 기록했다. 그렇게 잘 나가는 중에도 국내 금융시장에만 매몰되면 거대 해외 금융자본들의 농간에 이용당할 수 있다고 여겨 그들과 같은 무대에서 겨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외로 눈을 돌렸고, 주식 이외의 해외 부동산 투자로도 투자 범위를 넓혔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글로벌금융위기가 터지자 그의 성공신화는 한순간에 타격을 받게 되었다. 미국을 위시한 글로벌 증시가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고 미래에셋이 자랑하던 펀드들의 수익률도 급전직하. 중국펀드는 고점에 물린 사람들은 단기간에 수익률이 -70% 정도까지 폭락하면서 증권사는 수익에 타격을 받게 된다. 가뜩이나 위탁 수익이 작던 상태라 펀드잔고 급감은 여러모로 악영향. 05년도에 50~60개 정도였던 미래에셋증권의 지점 수는 08년 초에 200개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났었는데 늘어난 지점수만큼 직원들도 많아졌던 상황이다. 소규모였던 회사가 단기간에 급성장하기위해선 외부 인재 영입이 필수였던 관계로 활황장에서 높은 연봉에 많은 직원들을 영입한 것이 부담이 되게 된다. 단적으로 영업이익은 2006회계년도 1,599억, 2007년 3,686억이었으나 08년도에는 2,019억으로 급감. 반면 직원 수는 1,186명, 2,304명, 2,170명으로 1년만에 두 배가 된 후 유지했다. 2011년 8월 폭락장에서 신용융자를 금지해 버렸다. 이에 많은 개인투자자들은 자유시장경제의 총아인 주식을 위탁매매하는 증권사가 반시장주의적 정책을 사용했다며 힐책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곧 [[코스피]]는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일례로 그가 20년 전 2600억원에 매입했던 중국 푸동 빌딩의 경우는 2023년 1조 5천억원이 될 정도로 일찍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한 것과 주식 이외의 해외 부동산 투자처럼 투자 분산으로 인해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고, 향후 투자할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또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인도 시장의 경우 글로벌 금융자본들이 전부 철수할 때도 미래에셋은 인도 정부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고, 이후 경기가 회복되자 인도 정부의 배려와 인도에서의 좋은 이미지가 남아 오늘날 인도에서만 수십조원의 수탁고를 올리며 그의 지론처럼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