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해충 (문단 편집) == 생애 == 1928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현 [[안동시]]) [[남후면]] 개곡리[* 독립유공자 [[박해옥]]도 이 마을 출신이다.]에서 태어났다.[[http://m.kbnews.kr/view.php?idx=17900|#]] [[대구공업고등학교|대구공립공업학교]]을 졸업했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전 [[공군]]으로 자원입대하다가 전쟁 중 [[육군]]으로 편입되었다. 편입 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다가 수류탄 폭발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 때문에 공군으로 복귀해 [[상사(계급)|상사]]로 예편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안동에 살던 가족을 모두 데리고 [[대구광역시|대구시]] [[대봉동]]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한다. 1950년대 초반 [[유진산]], [[신도환]] 등이 결성한 청년단체에 가입하며 청년운동[* 이 시기의 청년운동은 [[백의사]]를 포함한 정치깡패 활동을 의미한다. 이 당시에는 좌우익 모두가 청년단체로 대표되는 정치깡패 집단을 동원해 서로에 대한 테러와 공격, 요인 암살 등을 일삼던 시기였다.]을 시작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4년 당시 25세의 나이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안동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낙선 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익희]] [[민주당(1955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정치적 행보를 본격화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안동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자유당 [[김익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여담으로 당시 박해충이 낙선한 이유 중 하나가 당시 [[안동군|안동시]]에서는 [[안동 권씨]]와 [[안동 김씨]]가 독특한 방식의 연대를 통해 선거 때마다 타 성씨의 진입을 합동으로 견제하는 바람에 [[밀양 박씨]]인 박해충은 당선되지 못했다. 실제로 [[제헌 국회]]부터 [[제4대 국회]]까지 안동김씨·안동권씨 두 문중이 당시 안동군 갑·을 선거구의석 두 자리를 거의 나눠 가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총선에서 박해충의 선거구호는 "잡성도 좀 해보자"였다. 1960년 당시 31세의 나이에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군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다가 11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이 당시 낙선의 여파로 가산을 탕진하면서 [[동대문구]]에서 솜 장사와 배달 일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다시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공화당 [[김대진(1917)|김대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우홍구]]와 복수공천을 받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의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우홍구는 낙선하고 본인과 [[민주공화당]] [[김상년]] 후보가 당선되었다. ||[[파일:25583_30753_530.jpg|width=100%]]|| || '''{{{#fff △ 1976년 10월 28일 [[안동댐|안동다목적댐]] 준공식 기념행사. (왼쪽부터) [[김재규|{{{#FFF 김재규}}}]] 건설교통부장관, [[박정희|{{{#FFF 박정희}}}]] 대통령, [[안경모]]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박해충 국회의원}}}''' || 국회의원 재직 당시 안동다목적댐을 조성하기 위해 여당과 야당을 넘어 두 팔 걷고 협조하는 등 댐 조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덕분에 야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랑 같이 준공식에 참여하였다. 다만 이 때문에 "박정희와 박해충이 같은 박씨라 친분이 두텁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사쿠라(정치)|사쿠라]]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실제 본인 역시 특정한 계보에 소속되지 않은 채 박정희 정권에서 대규모 국가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본인의 소속 정당인 야당의 입장과는 반대로 매우 협조적인 자세를 보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단수 공천을 받아 해당 지역구에 출마하여 역시 민주공화당 김상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0년 [[5.17 내란]] 직후 모처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이후 수년간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정치규제가 해금된 뒤인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김영삼]]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 바로 따라가지 않았고 신한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자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의 공천에서 탈락하자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안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류돈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독립공업 사장, 삼천리교재사 사장을 지냈으며 2005년 간 손상으로 인한 식도 정맥류 파열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