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충식 (문단 편집)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파일:external/thumbnews.nateimg.co.kr/2012222173632kkg6kan_T5_1456.jpg]]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a1n74113_2.jpg]] [[파일:/image/sports/2009/baseball/expert_contents/pdh/ec_content/expert_198/1234415841_file_image_1.jpg]] '''입단 첫해 14승(팀 내 최다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를 거두면서 언더스로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등판, [[문희수]]-[[선동열]]-[[송유석]] 3명의 해태 에이스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피칭을 하며 '''15이닝 181구''' 2실점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삼성 팬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91&issue_item_id=6742&office_id=224&article_id=0000001380|당시 그의 활약상]])[*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이건열]]이 술회하기를 도저히 박충식의 공을 때릴 자신이 없어 거울을 보면서 박충식의 투구를 맞는 연습을 미리했다고 한다. 룸메이트였던 [[홍현우]]는 '선배님 뭐 하세요'하고 웃으면서 물어봤던 건 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양준혁이 술회하길 이 당시 진루타를 치는 데 집중했어야 하나 송유석의 공을 만만히 보고 욕심을 부리다가 파울 플라이를 치면서 결국 3차전을 승리로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욕심이 어떻게 보면 박충식의 선수생명을 갉아 먹게 한 것 같아 지금도 미안한 감정이 있다고 밝혔다.] . 1994년에도 14승을 올리면서 [[성준(야구선수)|성준]]과 함께 팀 내 최다승을 기록했고, 1995년과 1996년에는 [[방위병]] 복무로 홈경기에만 출장하면서도 각각 9승과 8승 12세이브, 1997년과 1998년에는 각각 13승과 11승을 거두는 등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매해 150이닝 이상을 던지는 꾸준한 활약을 펼쳐 [[김태한]], [[김상엽]]과 함께 [[556|1990년대 중반 삼성의 암흑기]] 동안 마운드를 지탱했다. [[삼성 라이온즈/1997년/5월/4일|1997년 5월 4일]] 삼성이 [[정경배|한 경기 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운 경기의 승리투수이기도 하다. 사이드암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엔 투구각도가 딱 사이드암이었다. 언더핸드 투구폼으로 바뀐 건 프로 2년째이자 최고 성적을 기록한 [[1994년]]부터.] 최고 구속이 140㎞/h가 넘는 희소성 있는 투수[* 최근에는 [[임창용]], [[심창민]] 등 사이드암이라도 150㎞/h를 넘나드는 속구를 가진 투수가 꽤 있지만, 1980-1990년대만 해도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는 직구의 구속은 120-130㎞/h대에 불과 하였고, 슬라이더나 싱커 등 변화구 위주의 투수가 대부분이었다.]였으며, 거기에 엄청난 각도의 슬라이더와 강력한 싱커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99년]] 부상으로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갔다가, 2000년 [[이강철]]의 보상 선수로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에 이적하게 된다. 당시 삼성 구단에서는 '설마 부상 중인 선수를 데려가겠어?'라는 생각에 보호선수 명단에 묶지 않았는데, '''그 설마가 사실이 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김동수(야구)|김동수]]의 보상 선수로 LG로 이적하게 된 [[김상엽]]도 같은 케이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