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충식 (문단 편집) === 아마추어 시절 === [[광주광역시|광주]] 출신으로 [[광주 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업고등학교 야구부]]에서 뛰었다. 광주상고는 1988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 여담으로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일고]]가 청룡기 출전 前, 광주상고가 대통령배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광주일고는 선수들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기 위해 얼차려를 실시했고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http://culture.joins.com/sub/sub4_2_view.asp?num=450&page=8|관련기사]]]하기도 했으나, 개인적인 활약은 없었다.[* 그 때 광주상고의 에이스는 우수 투수상을 받았던 고천주였으나, [[원광대학교]] 진학 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004년에 새로 창단한 [[송원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계속 팀을 이끌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에 진학했으나 대학 리그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고,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프로야구/1993년/신인드래프트|1993년]] 1차 지명에서 [[이종범]]과 [[성영재]]를 놓고 고민하다 이종범을 지명한다.[* [[성영재]]는 [[한국프로야구/1993년/신인드래프트|1993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다. 박충식과 성영재 모두 말년을 고향팀에서 보냈지만 박충식이 부상을 자주 당한 관계로 비율스텟은 박충식이, 공헌도는 성영재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연고 구단인 해태에서조차 전혀 주목하지 않은 박충식을 지명한 것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박충식 본인도 삼성이 2차 1라운드라는 빠른 순번에 자신을 지명한 것에 놀랐다고 인터뷰한 기사가 있다. 다만, 경희대 야구장으로 삼성스카우터가 몇번 찾아온적은 있다고 하며, 삼성에서도 제구력 좋은 것 하나 믿고 뽑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 당시 [[경희대학교 야구부|경희대]] 선배들의 구타와 기합을 무서워해서 야구부 기숙사를 탈출하다가 [[고려대학교 야구부|고려대]] 기숙사를 탈출한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LG 트윈스]])과 종종 마주쳤다고 한다. 박충식에게 대학야구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잊고 싶은 기억이라고 하며 대학 중퇴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이 훗날 프로야구선수, 프로야구 [[선수협]] 사무총장, 대학야구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선수들의 권리 보호 및 복지 증진, 구타 등의 악습을 폐지시키는 데 밑바탕이 되고 있다. 대학 시절, 이후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과도한 기합과 구타를 경험하며 야구계의 악습 폐지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