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진영 (문단 편집) === 2000년대 === 프로듀서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시절. 2000년대에는 본인의 음악 활동보다는 프로듀서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90년대말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god(아이돌)|god]]가 '국민 그룹'이라고 불릴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지오디는 싸이더스에서 매니지먼트를 맡았으나 음악 프로듀싱은 박진영 측에서 맡았다. 멤버들도 김태우는 JYP, 나머지 멤버들은 싸이더스 소속으로 계약이 갈려 있었다.], [[박지윤(가수)|박지윤]]이 박진영의 프로듀싱을 받으며 '성인식'으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 초반이다. 2001년 자신의 7년간의 뮤지션 활동을 정리하는 6집 을 발매한 이후에는 팬들에게 기약 없는 이별을 선언하고 6년동안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다. 같은 해 태영기획의 상호를 '''JYP엔터테인먼트'''로 바꾸었고, 2018년까지 사용한 청담동의 구 사옥을 매입했다. 2002년 JYP는 총 3팀의 신인 가수를 데뷔시켰다. 첫 타자는 [[비(연예인)|비]]로, 데뷔곡인 <나쁜 남자> 의 반응은 심심했으나 후속곡인 '안녕이란 말 대신'이 크게 히트했으며 가요 프로그램 1위에 올랐다. [[별(가수)|별]]의 경우도 '12월 32일'이나 '안부'같은 곡이 상당히 인기를 얻는다. 보컬 그룹으로 결성한 [[노을(보컬그룹)|노을]]의 경우 당시 [[SK텔레콤]]에서 런칭한 모바일 서비스 [[June]]을 통해 데뷔시켰으며, 이 때문에 '최초의 모바일 가수' 라는 타이틀로 홍보했다. 물론 당시만 하더라도 피쳐폰의 인터넷 접속은 제한적이었던 만큼 현재 스마트폰 시대의 '모바일' 문화와는 거리가 먼 편이긴 하지만... 노을의 경우 푸쉬에 비해 크게 인기를 얻었다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나름의 인지도 정도는 얻는데 성공한 편. 2005년에 데뷔앨범이 나온 [[임정희]]는 데뷔 전 기대치에 비해 조금 아쉬운 결과를 얻는다. 다만 데뷔곡인 'Music is my life' 자체는 많이 알려진 편이다. 2003년 [[송대관]]이 [[유행가(송대관)|유행가]]를 부를때 독특한 발걸음이 특징인 전용 안무를 직접 짜줬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11&aid=0000098746|링크]], [[https://www.nongmin.com/plan/PLN/SRS/306490/view|링크 2]] 2002년 [[SBS 가요대전]] 시상식에서 우연히 만난 송대관이 자신의 신곡 안무를 짜달라고 대기실에서 즉석으로 부탁했고, 이에 박진영이 간단한 동작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한다. 2000년대 후반에는 본격적으로 아이돌 그룹들을 데뷔시키기 시작한다. 2000년대 후반 JYP는 경영상 변화를 맞는데,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god(아이돌)|god]]와 [[원투]], [[노을]], [[량현량하]] 등이 활동을 잠정 중단하거나 활동이 뜸해지고 박지윤이나 [[비(연예인)|비]]와 [[별]], [[한나]] 등 솔로 가수들이 타 기획사로 이적하면서 회사가 나름 위태로웠던 시기였다. 그러나 2007년 2월, JYP 최초의 걸그룹인 '''[[원더걸스]]'''를 데뷔시키고 6개월 뒤 나온 [[Tell Me]]는 대한민국에 UCC 열풍과 후크송 열풍을 몰고 온 데다 현재 불고 있는 '''걸그룹 열풍의 시발점'''이라고 할 만큼 크게 히트했다. 이때 원더걸스는 '''가요계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고 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고 연이어 '[[So Hot]]'과 '[[Nobody]]'까지 연이어 대히트를 시킨다. 재미있게도 한때 자신을 떨어뜨린 [[이수만]]의 [[소녀시대]]를 앞질렀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2008년엔 [[2PM]]과 [[2AM]]이 데뷔한다. [[2PM]] 역시 남성적인 매력을 뽐내며 정상급 보이그룹의 반열에 오른다. 대부분의 곡을 박진영이 프로듀싱한 만큼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시기였다. 거기에 2007년, 6년만에 발표한 본인의 7집 《[[Back To Stage]]》도 나름 인기를 얻는다. '니가 사는 그 집'이 독특한 안무와 인상적인 가사를 기반으로 인기를 끌었고, 음악적으로도 인정받아서 흑인 음악 전문 웹진 [[리드머]]에서 꼽은 2007년 올해의 알앤비 앨범으로 꼽히기도 했다.[* 참고로, '니가 사는 그 집'은 [[SBS]]의 대표 일요일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의 고정 멤버 [[지석진]]의 [[BGM]]으로도 쓰인다. 물론 그가 망신을 당하거나 게임에서 질때 쓰인다...] 선예와 함께 부른 <대낮에 한 이별> 도 너의 뒤에서와 함께 박진영의 대표적인 발라드 곡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다만 본격적으로 '미국병'에 걸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미국 진출의 시작은 2003년으로, 직전 해 가수 세 팀을 데뷔시키고 원투까지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자 더 이상 국내에서는 이룰 게 없다고 생각해 미국 시장을 노린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도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시도하며 여러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하기도 하고 JYP의 미국 지부를 설립해서 소속 연습생들의 미국 데뷔를 추진하기도 했다. 다만 성과는 좋지 않았던 편이다. 특히 2008년에 국내에서 인기가 최절정기에 다달은 원더걸스를 미국으로 데려가 활동하게 하는 바람에 국내 활동이 올스탑되고 멤버가 교체되는 내홍까지 겪게 된 것은 원더걸스 팬덤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부분이다.[* 원더걸스의 빌보드 차트 진입이라는 소기의 성과도 있었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소 논란이 있다.] 좋게보자면 훗날 JYP출신 아티스트들의 해외 활동에 밑거름이 된 시행착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최고의 시점에 국내 활동 기회를 놓치고 내리막길을 타버린 원더걸스의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없을 수가 없다. 정리하자면, 2000년대는 주로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여러 가수들을 정상에 올려놓거나 못해도 중박은 치는 등 상당히 성공적인 성과를 얻었으나, 그것을 기반으로 무리한 도전을 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 본 시기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