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일생 (문단 편집) === 7대 대통령 === [youtube(iE2cFRZmEe4)] || [[파일:parole_thumbn.jpg|width=100%]] || || 제7대 대통령 취임식 ||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만 1년 178일). 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돈을 투입해 국력이 소모되어 [[닉슨 독트린]]이 발표한데 이어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6.25 전쟁이래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미중관계]]는 해빙기를 맞았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데탕트]]로 불린다. 그러나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3선 개헌을 단행한 뒤 2년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박정희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53.2%의 득표율로 따돌리며 3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전의 선거와는 달리 [[막걸리]], [[고무신]] 선거라 불리는 [[부정선거]] 의혹과 지역감정 유포 때문에 야당의 비판이 일었다. [[김종필]]이 이미 "이 선거에 당시 국가예산의 15%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었고, 김대중에 대해서는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또한 박정희도 예상보다 신승을 거둔것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당연히 박정희는 정권의 위기감을 느꼈고, 대선 직후 치러진 [[8대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을 획득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는 했어도 28명의 의원이 무더기로 낙선하고 대도시 지역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여 개헌선에 훨씬 못 미치는 의석을 확보한 데 그친 반면, 야당인 [[신민당(1967년)|신민당]]이 [[진산 파동]]과 중앙정보부의 은밀한 공작에도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획득하고 득표율에서도 공화당과 고작 4.4%의 차이밖에 나지 않음으로써 이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선거부진과 함께 1969년을 정점으로 경제성장률 또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1969년에는 14.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에는 10%, 71년에는 10.5%, 72년에는 7.2%로 성장률이 떨어지는 추세를 이어갔고, 부실기업 문제가 불거졌으며, 10여년 전보다 생활수준이 확연히 나아졌지만 여전히 많이 가난한 이들이 많아 저축할 여유가 없어 은행에 돈이 없는 금융 인프라가 대단히 열악한 형편으로, 급성장중인 기업들이 대출받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데탕으로 인해 공산권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 평화 무드가 흐르자, 이러한 국제정세에 발맞춰 1971년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시작했고 [[전두환]] 정권 때 이산가족 상봉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72년에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파견해 [[김일성]]과 만나게 한 뒤, 이에 대한 답례로 [[북한]]에서 보낸 [[박성철(1913)|박성철]]을 만나 비밀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 남북은 평화통일의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합의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고 남북한 공식 대화기구로 남북 조절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시기의 경제정책 중 하나는 1972년 8월 3일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긴급명령 15호' [[8.3 사채 동결 조치]]는 경제악순환의 근절과 기업이 고리사채에 허덕이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업사채를 월리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회사를 설립하거나 투자하면 각종 혜택을 부여해 1973년 들어 설비투자가 급증하여 전무후무한 14.8% 성장을 하였다. 참고로 [[1972년]] [[12월 26일]] 7대 퇴임날이 하필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88세로 사망한날 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