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일생 (문단 편집) === [[5.16 군사정변]] === || [[파일:박정희각하컬러.jpg|width=100%]] || || 5.16 군사정변 당시의 박정희 || 박정희는 나이 만 43세에 군사정변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군은 1961년 5월 16일 해병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제2야전군 상당수와 제1야전군의 일부가 유엔군사령부에서 이탈하여 대한민국 정부 주요 기관 및 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는 박정희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장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육군 중장 [[장도영]] 관할 밖의 제1해병여단과 공수단을 비롯해서 서울 인근으로는 서울 동부의 제6군단 포병단, 서울 서부의 제30사단, 서울 남부의 제33사단, 서울 북부의 5사단 그리고 춘천,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이른바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KBS라디오방송국, 육군본부, 국방부, [[제6군관구사령부]](제 1지휘소로 사용), 서울지방경찰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정부 수반이 머물렀던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2공화국 당시 청와대에는 군 통수권자 [[윤보선]] 대통령이 기거하고 있었고 총리 공관은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에는 육군 특수부대(GDT)의 기습이 가해졌다. 그러나 [[장면]] 총리가 호텔 맞은편의 [[주한미국대사관]],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를 거쳐 [[혜화동]] [[http://www.carmel.kr|가르멜 봉쇄수녀원]][* 1963년 [[강북구]] [[수유동]]으로 이전했다.]으로 피신하고, 여러 각료 또한 은신함으로써 작전이 실패하고 계엄령 승인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오전 9시 경, 장면 총리에게 피신을 권한 후 체포당한 현석호 국방장관과 연금당한 장도영을 데리고 [[해군참모총장]] 해군중장 [[이성호(해군)|이성호]] [[제독]],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공군중장 [[김신]] 장군,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해병대사령관]] 해병중장 [[김성은(군인)|김성은]] 장군과 함께 청와대로 향해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계엄령 추인 및 혁명 지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대통령 또한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며 오히려 사퇴 의사를 밝혔고, 오전 10시경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을 알리자 곧 북한군이 휴전선에 결집, 10시 18분경에는 매그루더와 주한 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이 장면내각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국민들이 군사봉기를 딱히 반겨주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정변 직후 [[미 육군]] 제24군단 소속 첩보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10명 중 4명은 우호적, 2명은 다소 우호적이나 시기상조, 4명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1961년 5월 31일 주한미국대사관은 미 국무부에 "[[서울대]] 학생들이 정변에 대해 찬성 50, 반대 50의 지지를 보이고 있다." 고 보고했다.] 이에 [[정권]]이 [[군부]]에 넘어갔구나 하고 국민이나 미국이 믿게 하기 위해 그날 장도영 등을 앞세워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 [[김종필]]의 증언],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할 것임을 밝히며, 국무위원, 정무위원을 모조리 체포하고, 대의원 헌법기관을 정지시키는 한편, 오후 7시부터 [[장면]] 정권의 모든 권력을 [[군사혁명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인수함에 따라 국가 기구의 전권을 행사할 것이고, 오후 8시를 기해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원 등 의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후 오후 10시 30분에 [[윤보선]]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당원들의 신병을 전부 보장한다는 대가를 주고 대국민 특별담화 방송을 하게 하여 장면과 각료들에게 투항을 권고하였고 17일 내부 불만을 잠재우면서 장면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다가 그날 저녁부터 18일 아침까지 매그루더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야전사령본부청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육군]] 제1군사령관 [[이한림]]의 체포를 단행한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학군단]] [[훈육장교]]인 [[전두환]] 대위가 가담했는데 전두환은 졸업선배 신분으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불러다가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이 막았고 전두환은 이를 박정희에게 일러바쳤는데, 박정희는 강영훈을 구속 수감시키고 전두환이 하려고 했던 퍼레이드를 진행시켰다. >5월 18일 아침, 매그루터 사령관이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br]"지금 서울에 진입한 쿠데타 군은 2,700 명 가량인데, 박정희 소장이 영도하고 있소.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공산주의자요! 현재로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본색을 드러낼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쿠데타의 성격과 장래를 의심하고 있소.(중략)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고 있소. 따라서 우리는 공산주의가 싹트기 전에 미리부터 잘라 나간다는 견지에서 불행한 일이지만 쿠데타군을 무력 진압하기로 결정하였소!" >---- >[[김정렬(1917)|김정렬]] 국방장관의 '김정렬 회고록' 1993년, 박정희 매그루더 회담 주선 289p~294p의 일부 [[http://dlps.nanet.go.kr/DlibViewer.do?cn=MONO1199320392&sysid=nhn|(원문)]]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박정희/일생/진위 논란)] ##백년전쟁에서 소개된 박정희 행적에 대한 일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갑론을박은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일생/진위 논란]]에서 다룬다. 한편, 장면 총리는 16일 외부에서의 접촉을 차단하고선 유엔군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는 편지를 미 대사관에 보냈다. 17일 오후에는 가까운 사이였던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와, 18일 오전 총리 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가지며 동향을 파악하였다. 이후 18일 장도영이 찾아와 설득한 끝에 대동하여 18일 12시 30분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소집한 69차 임시 국무회의에 참여하게 되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가 아니라 투항식에 참여한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장면 총리는 퇴장하며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 "[[볼리비아#s-4|남미의 여러 나라처럼 ]]군부 변란이 상습적으로 되어버린다면 이 나라의 앞날이 무척 염려스럽소"하고 윤보선 대통령과 생전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이로써 박정희는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고, 총리 및 국무회의에서 계엄령 승인을 얻어 1시간 뒤 윤보선 대통령이 이를 추인하도록 함으로써, 봉기 60여 시간 만에 마침내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