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일생 (문단 편집) == [[만주군#s-4.1|만주국 육군]] 장교 시절 == [[교사]]로 재직하던 중, 어린 시절부터 군인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 가족 문제[* 어른들의 뜻에 따라 억지로 결혼한 아내 [[김호남]]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696|불화가 있었다]].] 등의 이유로 21세였던 1938년 11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81102002092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8-11-02&officeId=00020&pageNo=1&printNo=6176&publishType=00020|1938.11.02 동아일보 / <만주국군 육사군사과생 모집> <[[창춘|신경(新京)]] 31일발 동맹> "국경선 확보에 중대역할을 연출하고 잇는 만주국군은 금회 육군사관학교 '일계인 120명, 군사과생 30명'을 좌의 요령으로 모집하기로 되엇다. 지원자는 12월 20일까지 소정의 양식에 따라 치안부에 신입하리라 하엿다"는 내용의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607250020910102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6-07-25&officeId=00020&pageNo=1&printNo=5626&publishType=00010|1936.7.25 동아일보 / <육군관제 개정골자> - "교육입퇴영 등을 관장하는 현제군무국의 징모과도 인사국에 옮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에 1차로 지원했다. 처음엔 나이 제한[* 만주신문과 동아일보 기사내용에도 알 수 있듯 17세 이상 20세 미만 미혼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입학 자격 대상자가 아니었고, 편지에서도 밝히듯 본인(박정희)도 알고 있었다.]으로 거절당했지만, 동료 유증선 선생의 권유로 탈락을 재고시키기 위해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피를 내 '혈서'를 학생시험 용지에 써서 보낸다.[[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동료 선생 유증선의 증언)]] 이 혈서는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게재되었고, 이후 고향 선배이자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선인 출신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s-2|강재호]]가 신문을 보고 후원자가 되었다. 이러한 도움을 얻은 박정희는 드디어 10월 군관 선발 시험을 보았으며,[* 최고회의 의장 [[이낙선]]의 비방록, [[이재기|이재기]]의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증언]]] 결국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하였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박정희/일생/진위 논란)] 박정희 혈서에 대한 일부에 대해서 논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일생/진위 논란]]에서 다룬다. || [[파일:1942년 3월 만주 육군군관학교 졸업식.jpg|width=100%]] || ||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 경례하고 있는 사람이 박정희로 추정된다.] || 그 후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대학예과|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때 사용한 이름이 [[창씨개명]]한 이름인 타카기 마사오. 수석 졸업생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만주국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푸이]]에게 은사품으로 금장시계를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대학예과|예과]] 상위 성적자에게 베풀어지는 관행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2년)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신경군관학교]](만주국육군군관학교) 제4기까지는 성적우수자에게 일본육사 [[편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신경군관학교 제5기부터 조선인이 일본계로 간주하여 전원 일본육사 본과로 편입한다.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제2기이므로 성적우수자로서 편입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문서를 참조.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해 견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된다. 그해 7월 황군 육군 소위 '[[만주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 '[* 만주군 보병 제8단'은 사실상 일본군 '히노 다케오(日野武雄)' 소장이 만든 부대로 주로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또는 소련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1910~1945) 조선인 소위의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자는 87명 중 임관자는 63명으로 연평균 조선인 소위 1.75명, 만주국(1932~1945) 장교 임관자는 67명으로 연평균 조선인 소위 4.8명으로 전국에 한해 6.55명이 배출될 정도로 조선인이 소위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배장(소대장)으로 근무한다. 이 시기에 대해선 같은 해 7월 말 8월 초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여했다는 주장[*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5713|간도특설대 정보반 주재덕의 증언]]]과 [[땡보|실제로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아 비교적 편히 지냈고 전투에 참여한 경험은 없었다]]는 주장[*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 신현준 대위, [[방원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4655&CMPT_CD=A0289|중위의 증언]]]이 공존한다. 박정희는 부대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1944년 12월 23일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 부관 겸 부대의 [[기수#s-1|단기(團旗)]]를 책임 관리하게 된다.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한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10일에 출발하여 17일 집결했으나 일본이 패망 소식을 접하고,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해제당했다.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6단과 함께 미윤으로 이동한 후, 9월 21일 도망치기 위해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으나, [* 다만 광복 이후에 편입 된것이라 독립운동 여부와는 무관하다.] 4월 평진대(제1대대)가 해산한 후, 5월 8일 미군정의 방침에 의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박정희의 '한국 국민에게 고함', 조희연의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중에서]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762397|일설에서는 소설 <광복군>과 이를 근거로 '비밀 광복군'설을 주장하나 근거가 미약하다.]] 그렇게 고향 [[구미시|구미]]로 돌아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