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일생 (문단 편집) === 9대 대통령 === [youtube(eM47EffqgRM)] || [[파일:박정희_9대취임.jpg|width=500]] || || 제9대 대통령 취임식 || [[1978년]] [[12월 27일]] ~ [[10.26 사건|1979년 10월 26일]](303일) 1969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데탕트]] 등 동아시아에 화해분위기를 조성하여, 군사적으로 동아시아에 군사적인 개입을 줄이는 모습을 보였다. 1972년 [[중국]][* 그 당시 중국은 한국에게, 북한처럼 적대국이나 마찬가지였다.]을 방문하고, 73년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여 1975년에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망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1973년 파리조약으로 베트남전이 휴전이 되고 미국은 전쟁 재발시 [[공군]]을 투입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들어선 포드 정부는 의회와 여론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미국을 불신하기 시작하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을 하여, 충격 받은 적이 있는 미국은 당연히 이를 눈치 채고 끊임없는 압박과 위협을 한다. 결국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미국이 보여준 강력한 대북 응징의지와 확고한 안보공약 이행을 높이 사 핵개발을 중지한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와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전방위 로비를 벌이다 발각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이후 1977년 [[인권]]을 외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다시 [[한미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 후 미국의 [[청와대]] [[도청(범죄)|도청]]이 발각되는 등, 주한미군과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한미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변한다. 얼마나 최악이었냐면, 정부가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반미시위를 열었다. 어느 시점인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핵 개발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하고, 미군철수에 대항하는 협상카드로 쓰였다. 결국 1979년 2월 [[주한미군]] 철수 보류결정이 발표되었고, 카터가 6월 방문해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였는데 이때 다소 실랑이가 있었다.[[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181126/93025588/1|39년전 박정희-카터 주한미군 철수 설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