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은식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4D3DjETCp0E)] [[대한민국|한국]]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 지식인 출신[* 평생 학문만 하고 살려했고, 평안도나 황해도 일대뿐만 아니라 한양에서까지 성리학, 실학, 양명학까지 마스터한 걸로 널리 유명한 학자였지만, 모친이 아들의 공무원생활을 간절히 원해서 할 수없이 과거시험을 보고 소과는 물론 바로 그 빡세다는 대과 초시(향시)까지 한방에 합격했을 정도이다. 참고로 훗날 지지자들이 한시에 능했다느니 서예에 능했다느니 하는 [[이승만]]은 1880년대 박은식보다 응시 기준으로 약 10년 정도 늦은(1890년대) 세대인데 소과조차도 매번 합격을 못해서 포기한 사람이다. 소과에 대과 초시까지 다 합격한 박은식은 이승만과는 수준이 달랐던 진짜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물론 당시는 강화도 조약 이후 나라 정세가 점점 막장으로 가던 시기라 높은 관직은 하고 싶지 않아 낮은 관직을 하겠다고 하여, 대과 복시는 보지 않고 대기하다가 능참봉직을 받아 관직생활을 했다.]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나라를 위한 논설을 쓰고 애국 계몽 사상가로서 영향을 끼쳤다.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연장자 세대로서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힘썼고 의외로 강한 작전도 계획하여 독해보이기도 한 독립운동가이나, 평상시 사생활에서의 인품은 아량이 넓고 온화하고 사려깊은 인격자의 성품으로 유명하였기에 절로 수많은 [[청년]]과 중년 독립운동가들이 큰 어른[*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하던게 50~60대였지만(첫 활동은 한일합방 전 40대였을때 [[민영환]], [[이준(열사)|이준]] 등이 주도한 개혁당 활동 시절부터이긴 하다.) 어른으로 불렸었다. 지금이야 60대에 한창 [[정치]]하는 사람들이 널렸지만 당시에는 매우 적었는데, 평균 [[수명]]이 짧아서 50대도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노인 대우하는 표현을 들었다. [[결혼]]을 대부분 일찍 해서 40~50대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많았었다. 당시 서슬퍼런 일본 정부조차도 몇몇 사건에서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잡았다가, 독립운동 기여도와 무관하게 70대 독립운동가들만 그냥 나이가 많아서 앞으로 독립운동 더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검찰 불송치나 [[기소유예]]로 풀어준 적도 꽤 있을 정도였다.][* 한국인에게 전형적인 [[매국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을사오적]]조차 그 권세를 누리고도 한명 빼고 죄다 지금 기준으로 매우 일찍 죽었는데, 50대에 3명 60대에 1명이, 살인사건이나 사고도 아니고 그냥 질병으로 죽었다. 을사오적 같은 권력자조차 50대에 막 죽는 판에, 70대를 기대하는건 지금으로는 90살 넘는 장수취급이었다. 한명의 예외 장수 매국노는 팔순잔치도 하고 81살에 죽은 [[권중현]] 뿐이다. 사실 권중현을 [[이완용]]보다 더 극혐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다. 이완용은 젊을때부터 공부라도 스스로 잘해서 올라왔고(어릴적 세자였던 순종의 교사) 아관파천때 가장 노력한 신하였지만 노력 대비 무시당하는 설움이라도 당한데다가 매국노 되고 살인미수라도 당해서 죽다 살아나고 죽어서도 족보에서 삭제되었는데, 권중현은 공부도 못하는데 조선말에 빽쓰고(과거급제한 이완용과 달리 음서다) 뇌물쓰고 권모술수 별짓을 다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놓고 그자리에서 기껏 한 일이 매국노였기에 꼴보기도 싫은데 무려 혼자만 별일도 없이 건강하기까지 하고 죽어서는 [[안동 권씨]] 공식 족보에 조상으로 멀쩡히 남겨져 후손들에게 90년째 제사도 받으며 대우받기 때문.]으로 모신 인격자[* 임시정부 대통령제를 강하게 밀던 [[김구]]와 [[이승만]]의 세력들조차 독립운동계의 큰어른인 박은식을 함부로 반대하지 못하였고 그의 요구에 따라 임시정부 대통령제를 실제 폐지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탄핵]]으로 당시 이승만과 김구 측이 잠시 힘을 잃었던 시기였다.]였던 위대한 인물이다. 한국 근대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현대의 근대 사학자들은 박은식의 책을 읽지 않고는 연구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동명성왕실기(고구려)나 발해태조건국지(발해) 같은 고대사 서적도 그가 쓴 것이다. 특히 [[안중근]]에 대한 역사적 재발굴도 박은식의 저서에 의해 이뤄졌다. 박은식이 어릴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 아들처럼 유명하지 못하지만 사실 꽤 대단한 인물이다. 안태훈은 황해도 신동으로 유명할만큼 머리가 엄청나게 좋았고, 같은 신동인 박은식과 황해도 학문계 양대산맥이라 불리우며 10대 후반부터 함께 공부했었다. ]과 친구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시기 "안중근전"을 남겼는데 이후 중일전쟁 중에 분실되어 버렸던 상황에서, 먼 훗날 1992년 중국 흑룡강성의 [[하얼빈]]에서 70년만에 발견되면서 안중근이 재조명되었다. 안중근의 형제가 아버지처럼 모셨던 분으로 타계하던 날도 안중근의 친동생 [[안공근]]이 박은식 대통령을 옆에서 지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