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영훈(바둑) (문단 편집) === 입단하기까지 === 서너살 때부터 숫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 이유 없이 1부터 1000까지 재미삼아 쓴다거나, 지하철을 타면 구간별 덧셈을 한다거나, 전화번호부를 펴서 무작위로 숫자를 더한다거나, 식당 차림표의 가격 합계를 구한다거나. 아마추어 5단의 기력이었던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 아들이 바둑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 바둑을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자세히는, 바둑을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만 있던 중에, 박영훈이 다섯 살 되던 해 지리산을 등산하다가 산중턱에서 누나와 장기를 두는 손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이후 박영훈은 혹독한 교육을 받게 된다. 자신의 기력보다 높은 문제를 못 푸는 날은 잠도 못 잘 정도였다고.[* 오죽하면, 박영훈 九단은 아마추어 시절 지방대회 본선에 진출해서 그날 밤 잠을 잘 여관을 찾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예선탈락하는 날에는 아버지가 그냥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버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었는지, 1997년에 전국아마십강전에서 우승[* 당시 11세. 역대 최연소 아마대회우승기록.]하고 1998년에는 전국규모 아마대회에서 4관왕을 차지하게 된다. (학초배, 아마유단자대회, 삼성화재배 아마바둑오픈, 하이텔배) 이 즈음해서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성격상 연구생 생활이 맞지 않았는지 2년만에 연구생을 그만두고 최규병 九단, 유창혁 九단 문하에서 바둑을 배우게 된다. 1999년, 여덟 번 탈락하고, 아홉 번째 도전한 입단대회에서 드디어 입단. [[파일:070709-21.jpg]] [[2004년]]과 [[2007년]] [[후지쯔배]]를 우승하면서 세계대회 커리어를 안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