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영효 (문단 편집) == 생애 == 1861년 [[경기도]] [[수원시|수원]]에서 진사 출신 [[가문]]에서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무량'이었다가 후에 '영효'로 [[개명]]하였다. 12세 때 조선 25대 왕 [[철종(조선)|철종]]과 [[후궁]] 숙의 범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인 [[영혜옹주]]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금릉위'에 봉해졌으나[* 기록에 따르면 [[미소년]]이라서 왕녀와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 나잇살이 붙기 전 찍은 [[사진]]을 보면 확실히 [[미남]]상이다.[[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50302/69898389/1|사진 링크]].] 3달 만에 영혜옹주가 [[사망]]하면서 홀몸이 되었다. 부마는 [[재혼]]을 못 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평생 홀아비 인생을 12살 나이에 [[예약]]한 셈.[*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부마이기도 하다.] 이를 딱하게 여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영혜옹주 하가 당시 영혜옹주를 모시러 따라온 [[궁녀]]들을 하사해 [[첩]]으로 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영혜옹주의 생모가 [[숙의 범씨]]인데 고종이 내린 궁녀도 범씨였다고 한다. 범씨가 흔한 [[성씨]]는 아니므로 기막힌 우연.] 그 뒤 여러 번 첩을 들였지만 [[불화]]설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며 이 때문에 자식들을 여럿 두었고 박영효의 2남의 딸이 [[이우]]의 부인 [[박찬주(교육자)|박찬주]]다.[* 하지만 박영효의 아들은 전부 박영효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박영효가 친일 부역을 해서 받은 [[후작]] 작위를 계승한 것도 박영효의 손자(차남의 아들)인 [[박찬범]]이다.]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서울특별시|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개화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처음으로 [[김옥균]]과 관계를 맺었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임오군란]] 이후 1882년 8월 8일 제3차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이 때 [[태극기]]가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선진 [[문명]]이 발달해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급진 개화파에 참여했으나 온건 개화파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서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한 민씨 일가 사람인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정권]] 탈취를 시도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주동자 중 1명이었던 형 [[박영교]]는 청나라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공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원양은 10살된 어린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 전제[[정치]]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는데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그래서 한동안 박영효의 집안 [[반남 박씨]]에서도 '영(泳)'을 '승(勝)'으로 바꾸었다는 근거없는 [[풍문]]이 돌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영효는 반남 박씨 중 '오창공파'로 다른 반남 박씨 파와 다르게 '오창공파'는 원래 항렬자가 '승'이 아니라 '영'을 썼으며 갑신정변 이후에도 '영'자 항렬을 썼다. 무엇보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59년 전에 [[출간]]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일본에서 망명하면서 수 차례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같은 망명자 김옥균과는 사이가 나빠져서 "옥균이 쟤가 갑신정변에 뭐 한 거 있나? 나랑 [[홍영식]]이 다 했지..."라고 [[디스]]를 날리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부터 일본에 자리를 잡아서 나름 [[인기]]를 누리며 잘 살던[* [[일본 정부]]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지만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도야마 미쓰루]],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등이 지원을 해줬다.] 김옥균과는 달리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김옥균처럼 그들보다 미국 환경에 적응을 못하였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금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초기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오쿠무라 엔신]]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와 얽히는 관계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11524|어떤 소설에서는 옳다꾸나 하고 야설을 써놨지만]][* 저 책의 저자인 [[신봉승]]이 대본을 쓴 <[[찬란한 여명]]>에서도 그렇게 묘사된다. <찬란한 여명>에서 박영효 역은 [[이민우(배우)|이민우]], 오쿠무라 이오코 역은 [[송윤아]]였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근거는 없다. 이 때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일본의 의도에 따라서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후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분류되면서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같은 급진 개화파 동지인 [[서광범]]과 협력해서 김홍집을 [[바지사장]] 수준으로 내려버리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였고 당시 친러 [[정책]]으로 가던 내각의 흐름을 친일 내각으로 되돌리고자 [[왕비]] 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이 [[유길준]]이 밀고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에 일본으로 2차 망명을 가는데 심지어 그런 후에 [[을미사변]]의 배후 조종 혐의까지 받았는데 일본 사람들에게 "[[우범선]]을 쓸만하다"고 추천했다거나 하는 정황이 포착되지만 정말 [[명성황후]]를 죽이자고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원한을 단단히 산다. 이후 조직된 [[독립협회]]의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에서 박영효를 의원[* [[대통령]] 추대설과는 달리 진짜로 독립협회는 박영효를 대신으로 추대했다.) 물론 이 때 박영효는 [[반역]]자로 단단히 [[낙인]]찍힌 상태였고 이는 독립협회의 몰락을 불러왔다.]이나 심지어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 1900년에는 [[윤치호]] 등과 연통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밀정을 조선으로 보냈던 것이 들통나면서 궐석 [[재판(법률)|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는 등 [[황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는 듯 했다.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국제]] 사회에서 고종으로부터의 [[을사조약]] 무효 선언 거사] 때문에 [[일본 정부]]에게서 고종이 퇴위당한 뒤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즉위 시기에 몰래 밀입국하였고 그 상황에서 먼 [[친척]] 뻘인 [[박제순]]이나 일본 고문 가토 등과 연통해서 자신에 대한 사면령을 받아내고는 정식으로 귀국한 것처럼 행세했다. 이후로 [[을사조약]]의 주범인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들어갔으나 고종의 [[양위]]에 개입한 대신들을 [[암살]] 미수한 혐의[* 사실 별로 근거는 없고 이완용과의 [[정권]] 다툼에서 밀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박영효가 고종의 양위를 기뻐하지 않았으니 역적이라고 불렀고 박영효는 이완용이 역적이라고 했을 뿐 죄가 없다고 맞섰다. 이 때 박영효가 [[구속]]되었을 때 [[배탈]]이 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약]]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딱히 이완용과 박영효 사이에 차별성은 찾기 어렵다.]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가 해제되었으나 상경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 때도 다시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몰래 상륙을 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결국 [[경술국치]]를 [[경상남도]] [[창원시|마산]]에서 맞이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cab72e5e02a91e2e78c0dceb6706aab.jpg|width=100%]]}}} || || [[동아일보|{{{#fff '''동아일보 사장 시절 모습'''}}}]] ||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8년 [[조선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1919년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 등과 함께 [[경방|경성방직]] 창립에 기여해 1935년까지 초대 사장을 지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초대 사장이 되었으나 1920년 [[평양시|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요 사건을 <동아일보>가 게재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 조치를 당하자 사임하였고 1922년 [[경희궁]] 내 전각인 [[황학정]]을 철거해 등과정 터로 옮기는데 앞장섰으며 1926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격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1932년 일본 [[귀족원(일본)|귀족원]]으로부터 의원직을 맡아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932년 [[조선방송협회]] 초대 부총재도 맡았다.(총재는 없었다.)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임기 중이던 1939년 9월 21일 향년 78세에 [[노환]]으로 죽었으며 작위는 손자 박찬범이 계승했다. 죽은 뒤 고작 3개월 동안 [[부부]]였으나 평생 정실 부인이었던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화장하였다고 한다. 부산 다대포 (현재 지하철1호선 다대포항역 옆 라파요양병원자리)에 명당이 있다고 추천받아 그곳에 처음 운구하여 매장하였으나 이후 자손이 사업실패로 묘소를 팔고 경기도로 이장함.[[http://www.yangsa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1607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