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암 (문단 편집) == 일생 == 1924년 2월 29일 서울 [[종로구]] [[숭인동(종로구)|숭인동]]에서 태어나 1949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다. 본디 그는 [[치과의사]]가 되려 했지만 이를 포기하고 [[6.25 전쟁]]으로 피난 중인 1951년, 대구에서 28세의 나이로 극단 '신협'에 입단해 연극 무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1962년에는 신협이 민극에 통합되면서 '국립극단'으로 출범되어 그도 그쪽으로 갔다가 1963년 신협이 재건되면서 그곳으로 돌아왔다. 1952년에 대구 자유극장이 제작한 영화 <태양의 거리(민경식 감독)>에 불량아를 가르치는 훈육 주임 역으로 은막에 데뷔하여 1955년 김기영 감독 영화 <양산도>에서 무령 역으로 탁월한 악역 연기를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현해탄은 알고있다(1961)>, <고려장(1963)> 등 [[김기영(1919)|김기영]] 감독의 초기작부터 <[[이어도#s-3|이어도]]>,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등 김기영 작품에 단골로 나왔다. 1956년에 [[자유부인(영화)|자유부인]]에서 장태언 교수 역으로 열연하여 그의 지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당시 지식층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어 톱스타의 경지에 오르지만, 아쉽게도 [[신영균(배우)|신영균]], [[최무룡]], [[신성일]], [[남궁원]] 등 굴지의 남배우들이 크게 부각되는 바람에 그닥 오래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이런 연유로 1960년대부터 [[조연]] 배우로 변신하여 4백여 편의 온갖 영화에 출연하며 비중있는 주연급 조연들을 주로 맡아 소위 요즘 말하는 '명품조연'으로서 한국 영화사를 풍미했다. 1958년 [[신상옥]] 감독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의 검사, 1965년 [[유현목]] 감독 영화 <춘몽>의 대학교수 등과 같은 지적인 전문직 역할은 물론, 멋쟁이 연인, 자상한 아버지, 암흑가의 보스 등 배역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말년에는 [[우뢰매]] 같은 아동영화나, [[흡혈귀]] [[드라큘라]]를 다룬 호러영화에 [[스님]](?)으로 나와 드라큘라를 퇴치하는 역을 맡는 등 이 분야 저 분야 가리지않고 꾸준히 활약했다. 그 외에도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부위원장(1969~1971)과 위원장(1971~1974)을 맡아 배우와 영화사 간 분쟁을 해결했고, '연예인 새마을축구대회'를 만들어 그 수익을 새마을발전기금으로 서울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영화인 생활 내내 '적이 없는 사람'으로 불린 인격자인 그는 1989년 3월 22일 밤 9시 30분,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6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특히 그는 죽기 전 장성환 감독의 영화 <애사당 홍도>[* 1992년 11월 7일 정식 개봉.]에 조연으로 출연한 상태였으며 영결식은 동월 25일 영화진흥공사 광장에서 영화인협회장으로 거행되었다. 여담으로 [[이영후]] 이전에 백범 [[김구]] 역으로 이름을 날린 배우로도 알려져 있다. MBC 드라마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 ~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에서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 [[이진수(배우)|이진수]]는 90년대 [[스포츠서울]]에 쓴 연예계 컬럼에서 박암이 죽을 당시를 회고했다. 종교가 [[가톨릭]]이던 박암과 술자리를 했는데 유명한 어느 선배 배우가 가톨릭인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가 세상을 떠날 당시 [[고해성사]]를 하러 온 [[신부]]에게 "이보시오...난 평생을 경건한 척 하면서 더러운 짓 다 했소...그래놓고 죽기 전에서야 겁먹고 [[고해성사]]를 할 자격이 있겠소? 그냥 안하고 죽겠소. 내가 지은 죄는 저 세상에서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테니...."이란 말을 하고 숨을 거두던 걸 언급했다. 박암은 "그 선배 정말 멋진거야! 죽을때 겁먹고 고해성사하는 것들 흔한데 얼마나 멋있냐"라며 칭송했는데 이진수가 "그럼 선배님도 돌아가시면 그럴 건가요?"라고 하자 즉각 물론이라며 답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박암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박암이 죽을 때 이진수도 곁에 있었는데 박암의 아내가 신부님이 왔으니 고해성사를 하라고 하자 군말없이 한 게 [[유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없이 이진수를 보며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진수는 스포츠서울 컬럼에서 "고해성사를 거부하고 숨을 거둔 선배랑 박암 선배랑 누가 더 나은지는 아직도 구별할 수 없다..."라고 회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