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시춘 (문단 편집) == 생애 == [[1913년]] [[10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시|밀양군]] 밀양면 남문내리(現 [[밀양시]] [[내일동]] 226번지)에서 남포(南浦) 박원거(朴遠居)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권번[* 기생 양성소이다.]을 운영해서 유년 시절부터 음악을 접하면서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2살 때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고, 아버지의 치료에 가산을 탕진하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유랑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하던 중, 시에론레코드의 이서구, 박영호 등을 만나 작곡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정식 데뷔는 [[1931년]]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을 작곡하면서 하게 되었고, '애수의 소야곡'이 그야말로 대히트를 치면서 박시춘과 남인수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후에는 [[송민도]]의 고향초,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 [[현인]]의 [[신라의 달밤(가요)|신라의 달밤]],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백난아]]의 [[낭랑 18세(노래)|낭랑 십팔세]], [[신세영]]의 전선야곡, 군가 [[전우야 잘자라]],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현인]]의 [[럭키서울]] 등의 곡을 발표하며 더욱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무려 3천여곡의 노래를 작곡했으며, 이 때문에 박시춘을 '한국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 위 노래들 중 신라의 달밤, 낭랑 18세, 전선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는 2017년 불후의 명곡에서 리메이크되었다.] [[1943년]]에는 영화 '조선해협'으로 영화감독으로까지 데뷔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 때는 해군 정훈국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군가인 '전우야 잘자라'를 이때에 작곡했다. 전쟁 종전 후에는 전쟁의 아픔을 담은 노래인 [[금사향(가수)|금사향]]의 님 계신 전선을 작곡했고,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백설희(1927)|백설희]]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장세정(가수)|장세정]]의 샌프란시스코를 작곡했다. [[1950년대]]에는 영화와 음악 작업을 함께 했으며, 직접 영화사를 차리기도 했다. 심지어 [[1956년]]에는 영화 '청춘쌍곡선'에 단역배우로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삼등호텔'을 제작했고, 같은 해에는 '딸 칠형제'라는 영화의 연출까지 맡았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았으며, [[198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서훈받으며, 대중가요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서훈을 받게 되었다. 그 후에는 [[가요무대]] 등에 간간히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였고, [[1996년]] [[6월 30일]] 오후 8시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서울중앙병원]]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070200099138007&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6-07-02&officeId=00009&pageNo=38&printNo=9485&publishType=00010|타계했다]]. 향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