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승직 (문단 편집) ==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 행적]] ==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했을 때, 창업주 박승직은 [[이등박문]]을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총 41명) 및 위원(총 100명)으로 참여했다. 이 국민대추도회는 한성부민회가 주최하고 각 단체가 연합하여 추진한 것으로, 한성부민회는 1907년 10월 [[다이쇼 덴노|일본 황태자]]의 ‘[[대한제국|한국]] 시찰’을 환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비상설단체인 ‘대일본황태자봉영한성부민회’를 모체로 조직됐고 이듬해 [[유길준]]이 주도해 한성부민회로 재조직됐다고 기록돼 있다.(이용창,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참조). 박승직의 친일 행적은 [[일제강점기|일제 치하]] 내내 계속됐는데 [[1919년]]에는 [[박영효]], 최진 등이 만든 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 이사로 참여했고 [[1922년]]에는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회 임원 등을 지냈다.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도모와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박승직은 또한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에 선임됐다고 [[친일인명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매일신보]]가 마련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박승직은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화민국 국민정부|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없음을 강조했다”고 되어 있다. 박승직은 같은 해 2월 조선지원병 제도 제정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박승직은 매일신보에 지원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담화를 통해 ‘지원병 제도 실시는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됐다’며 환영했다. 친일인명사전은 박승직이 같은 해 8월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됐고,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38년 총독부의 종용 하에 동아일보 김성수, 조선일보 방응모, 이화여대의 김활란 등이 결성한 전시동원 선전조직으로 이듬해에 공표된 국민징용령에 맞춰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섰다. 박승직은 이 조직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개편된 뒤인 [[1940년]] 10월에도 평의원을 맡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41년]] 12월엔 경성부 총력과를 직접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만원을 헌납했고 [[1943년]]에도 두차례에 걸쳐 방공감시대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헌납했다.[* 이 때문에 결국 [[두산|두산그룹]]이 [[전범기업]] 분류가 붙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