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승종 (문단 편집) === 벼슬의 시작과 [[광해군]] 정권 === 23살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별시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문명이 높던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벼슬길[* 이들의 조선왕조실록 졸기에는 글을 잘 썼다는 평가가 기재되어 있는 전통적인 글 셔틀 집안이다.]이 그러하였듯이 봉교(奉校. 왕의 칙서를 기록), 지제교(知製敎. 왕이 내리는 교서 초안) 등으로 벼슬을 시작하는데, [[정여립]]의 절친인 이진길(李震吉)을 사관으로 추천하면서, 글의 솜씨가 괜찮으니 한 번 써보는 것으로 했다가 한 죄로 한 번 짤리나 곧 복직되고 대사간, 도승지, 부제학, 예조참판, 병조참판, 병조판서, 대사헌 등으로 별탈 없이 승진한다. 한 때 유영경과 친했다는 이유로 광해군 즉위 이후에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이후 다시 복귀하여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애초 명론과 교격(矯激 : 글과 말을 과하게 화려하게 쓰는 것)을 싫어하는 가풍 탓도 있어 북인에 속하게 되면서 박승종의 인생은 이후 강제 가입으로 점철되게 된다. 애초 정치색이 크게 없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심지어 생전에는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류, 이귀하고도 은근히 친했다. [[북인]]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으로 갈리고, 소북은 또 강경 지지파인 유영경의 탁소북, 온건 지지파인 남이공의 청소북으로 갈리게 되는데, 이 때는 또 탁소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선조 사망 직후 탁소북 내에서도 [[광해군]]을 몰아내는 건 좀 아니지 않냐는 이들이 많아 탁소북은 그냥 자멸하게 되었고, 박승종은 광해군의 처남이자 청소북 소속인 유희분과 손을 잡았다 의외로 광해군 정권은 이이첨이 중심이 된 대북보다는 소북과 남인과 서인의 연합 정권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광해군]]의 세자빈 책봉이 이루어지는데, 대북과 소북의 타협 속에서 그나마 온건파인 박승종의 손녀를 세자빈으로 책봉하게 된다. 임진왜란에 따른 전후 복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치적인 상황은 혼란을 거듭하였다. [[영의정]]은 광해군 즉위 직후에는 [[유영경]] (소북)이 유임되었으나 대북세력에 의해 탄핵된 뒤 [[이원익]], [[이덕형]] (남인)으로 이어지고, 좌의정은 [[허욱]] (소북)과 [[기자헌]] (대북) 등 북인 계열이었다가 [[이덕형]] (남인)과 [[이항복]] (서인)으로 이어지고 [[우의정]]은 [[한응인]] (서인)이었다가 [[심희수]] (남인), [[이항복]] (서인)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기자헌과 이이첨 등이 수장에 있었던 대북이 이들의 집권 내내 극심한 공격을 가한다. 결국 1611년 회퇴변척소[* 정인홍이 [[김굉필]], [[정여창(1450)|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자, 이에 반대한 상소다. 그 중에서 이언적과 이황을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내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1612년 [[봉산옥사]]→ 1613년 [[계축옥사]]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동 속에서 영창대군 살해 반대와 인목왕후의 폐위 문제로 서인과 남인은 순차로 사직, 탄핵되었는데 [[소북]]은 완전히 방관하고 있었다. 이후 봉산옥사로 [[정인홍]] (대북)이 우의정에 오르면서 슬슬 대북이 성장해나가기 시작해 나가다가 계축옥사로 이항복과 이덕형이 탄핵되면서 대북 정권이 수립된다. 당시 박승종은 형조판서를 하다가 병조판서로 옮겼고 봉산옥사 당시에 판의금부사였던 박동량이 대북파의 탄핵을 받아서 물러난 뒤 판의금부사까지 겸직하게 된다. 한편 이원익은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한데 영 이상하게 남인이 되었다. 본래 본인은 당색이 그다지 없었으나 스승인 이준경이 이이를 엄청 깐 탓에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남인 주류인 이황의 제자들과도 학맥이 완전히 다르고, 스승의 가르침 으로 이황의 제자들과도 교류가 없었다. 외직으로 밀려난 이원익을 번번히 중앙 요직으로 임명하여 출세길을 열어준 것은 막상 이이였는 것이 또 개그이다. 사실 이원익은 성격이 원만하고 모두와 두루 친해 적이 없었고, 류성룡과 친하게 지내 남인 취급을 받았다. 류성룡, 이덕형 실각 후 사망하자 딱히 남인의 중심이 되줄 사람이 없고 그만큼 오래 살은 이원익이 자동적으로 남인의 구심점이자 원로가 된 것이다. 이덕형도 마찬가지로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한데 장인은 북인의 대부 이산해, 절친은 서인 계열의 이항복이었다. 심지어 이산해의 연줄로 정인홍 밑에서 배운 적도 있다. 먼 친척이지만 이이첨과도 같은 가문 사람이기도 하다. 왜 남인인지 이해 불가. 다만 상대적으로 북인에 비해 온건한 태도를 보였고, 분당 초기라 남인으로 여겨진다. 또한 당시까지는 당색이 달라도 서로 친교를 맺고 양가 집안끼리 혼인을 하기도 하는 등 크게 척을 지진 않았다. 흔히 서로 얼굴보기싫어 병풍치고 상대 당파 구성원보고 이놈저놈 욕하고 죽이려고 벼르는 것은 잦은 환국으로 붕당 질서가 파괴되는 [[숙종(조선)|숙종]] 이후부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