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세당 (문단 편집) === 이경석 신도비명 사건 === 1702년 박세당은 이경석의 [[후손]]에게 묘비명 찬술을 부탁받고 자신의 마지막 글을 지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G&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98A_0120_010_0050|이경석 묘비명 링크]] 생전에 송시열과 대립했던 박세당은 송시열이 이경석을 [[수이강 사건]]으로 조롱한 것을 비판하며 신도비명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人其來敬) 이 글을 보고 분개한[* 동양에서 올빼미는 인식이 좋지 않은 새인데(멀게는 주공단이 자신을 음해하는 자들을 올빼미에 비유하는 시를 지어 자신을 억울함을 호소한 바 있다.) 그걸 송시열에 비유했으며 올빼미에 비유해 송시열을 착하지 않고 군자가 아닌 자라고 욕한 것이다. 노론에서 송시열을 송자라고까지 했으니 뚜껑이 열릴 일이다.~~정작 수이강 사건으로 인해 군자라 하긴 뭣한건 안비밀~~] 노론과 송시열의 당여들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여겨 숙종에게 비문과 저서인 『사변록』을 불태우고 머나먼 벽지로 유배보내라고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재야에 머무르던 [[김창협]], [[김창흡]] 형제도 참전하였다.] 숙종은 노론의 요구를 받아들여 비문과 『사변록』을 불살라버리게 된다.[* 이경석 신도비는 50년이 지난 1754년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건립되었는데 노론에 의해 글자가 깎여나가고 땅에 파묻혔다. 이후 1979년 이경석의 후손들은 비석을 재건하고 옆에 새로 글씨를 새긴 신도비를 함께 세워 오늘날 이경석의 묘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