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목월 (문단 편집) == 그 외 == * [[이승훈(시인)|이승훈]], 시인 [[나태주(시인)|나태주]], 배우 [[윤여정]]도 그의 제자이다. *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들 중에서 토속적 정서가 강한 시가 많은 사랑을 받다보니[* 이를테면, '''이별가'''나 '''불국사''' 등의 시...]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시 세계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박목월의 시상에는 개신교적 정서가 상당히 깊게 흐르고 있는데, 의외로 이런 부분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의 어머니가 독실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그 덕분에 남편(시인의 부친)도 전도했고, 당연히 자녀들은 신앙인으로 자라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교회를 설립할 정도였다고 하니 개신교 명문가에 속하는 집안이다. 이 덕분에 생전에 개신교 잡지인 "신앙계"[* [[여의도순복음교회]] 계열에서 발간하는 잡지이다. 1990년대까지는 개신교계에서 제법 위상이 높았던 잡지였다.]에 가끔 축하시를 싣기도 했다. 시인의 사후, 부인이 그의 유고 중에서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시들을 따로 모아서 "크고 아름다운 손"이라는 유고시집을 내면서 이런 사실이 일반인들에게도 조금 알려졌다. [[http://www.duranno.com/sl/view/article.asp?nid=9301&scroll=3930&page=people|박동규 교수가 기독교 잡지 "빛과 소금"의 인터뷰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 1952년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피난지인 대구의 교회에서 박목월을 따르던 두 자매가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장녀가 깊은 감정으로 다가오자 목월은 거절한 후 서울로 상경하게 되고, 그녀는 결국 단념하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명문여대를 다니던 동생은 박목월을 포기하지 못해 다시 만난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했고, 박목월은 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한양대 국문과 교수 자리도, 가정도, 명예도 모두 내던지고 연인과 함께 종적을 감췄다. 얼마 뒤 시간이 지나고 박목월의 아내 유익순은 그가 제주도에서 연인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남편을 찾아나섰다. 막상 두 사람을 마주하게 되자 아내는 “힘들고 어렵지 않느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지내라고 두 사람의 겨울 옷을 내밀고 서울로 사라졌다. 당시 여자는 가족의 설득으로 동거생활을 끝냈고 , 목월은 가정으로 돌아왔다. 그의 시인 『이별의 노래』에는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한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 -「이별의 노래」 * 박목월이 제주에서 지낼 당시 제주 도내에 거주한 문인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박목월이 묵었던 동화여관에서 종종 시낭송회를 가지기도 했다. 박목월과 같이 머물던 연인이 떠날 적에 도내 문인들과 박목월이 같이 배웅하였는데 당시 모습을 본 시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kwank99&logNo=30073447984|양중해]][* [[제주대학교]] 교수, 제주문화원장 역임]가 당시의 모습을 시로 남겼는데, [[제주제일중학교]] 동료 교사이자 가곡 [[명태(동음이의어) #s-1|명태]]의 작곡가인 변훈[* 가곡 명태의 초연 실패 후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외무고시]]에 합격해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지냈다.]이 이 시를 작곡하여 가곡 『[[https://youtu.be/qGa776AsAos|떠나가는 배]]』를 발표하였다. 발표 당시에는 고인을 배려해 당시 상황을 얘기하지 않고 제주를 떠나가는 문인들을 보면서 작사했다고 하지만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40421009004|후일 증언]]들이 나옴에 따라 박목월 시인의 제주 생활과 시를 쓰게 된 사연이 재조명 되었다. * 어느 날 밤에 나무에 걸린 달의 모습이 너무 고와 필명을 목월(木月)로 지었다고 한다. * 1965년 [[유안진]]을 천거해 시인으로 등단시켰다.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한국 남성 작가]][[분류:1915년 출생]][[분류:1978년 사망]][[분류:경주 박씨]][[분류:고성군(경상남도)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분류:대한민국의 문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서울대학교 재직]][[분류:연세대학교 재직]][[분류:중앙대학교 재직]][[분류:홍익대학교 재직]][[분류:한양대학교 재직]][[분류:고혈압으로 죽은 인물]][[분류:계성고등학교(대구)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