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명수 (문단 편집) === [[무한도전]] 이전 인기 관련 === 우선 표현을 정확히 해야 하는 문제로, 박명수는 무한도전 이전에는 지금 같은 위상의 S급 예능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연예인이라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무명 시절이 아예 없었다. 데뷔 초에는 [[유재석]]보다 훨씬 잘 나갔고[* 이는 [[무한도전]]의 최전성기 시절에 유재석도 인정했다. 초심 특집 당시 데뷔 시절 영상을 보던 유재석이 박명수가 자신이 90년대 후반까지는 유재석보다 인기가 좋았다는 말에 유재석이 바로 인정했을 정도. 91년에 데뷔하고 10년 가까이 무명이었던 유재석은 방송 초기 카메라 울렁증 때문에 클럽에선 춤 제일 잘 추더니 방송에선 허우적 대지를 않나, NG를 내서 방송 중에 쫒겨나기까지 하는 등 스타트가 좋지 못했고, 재능이 아까워서 꽂아주는 식으로 방송 생활을 간신히 이어 나갔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이름도 없는 유재석이 ‘우쒸’와 정치 콩트로 날아다니던 박명수보다 인지도에서 많이 밀린 것은 사실. 이 때문에 [[무한상사]]에서도 [[유재석(무한상사)|유재석 부장]]보다 먼저 입사하며 선배였으나 유 부장이 뒤늦게 능력이 발현되며 승진 서열에서 밀려난 것으로 표현된다.], MBC 개그 전성기에 어떤 개그 프로그램이든[* 주말 콩트 프로그램이나 드라마타이즈 계열 프로그램, 개그맨들 위주로 나오는 토크 위주의 퀴즈 프로그램 등 MBC의 개그맨 관련 프로그램에는 안 나온 적이 거의 없다.][* 다른 개그맨들이 주류로 활약하여 레전드가 된 프로그램들조차 박명수는 몇 번씩 나온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서경석]], [[조혜련]], [[김진수(코미디언)|김진수]], [[김효진(코미디언)|김효진]]이 주연인 코너인 울엄마에도 박명수는 조연으로 출연했었다. 즉 탑급 인지도의 개그맨들 사이에서 쩌리는 해봤지만, 개그맨 전체에서 쩌리인 적은 무한도전 전까지도 10년 넘게 단 한번도 없었다.] 다 출연[* 당연히 항상 주연은 아니었지만, 주연도 많이 하긴 했었고 최소 조연은 항상 했었다.]했었을 정도의 주류 개그맨이었고 B+ 내지 A-급으로 CF 촬영 등으로 대중들에게 존재감은 확실한 편이었다.[* [[김경진(코미디언)|김경진]]의 말마따나 거성 엔터에서 B-급에서 B급이 되기는 했지만 B+급은 못 될 것 같다고 했는데, 지금의 김경진보다는 90년대의 박명수가 훨씬 성공한 축에 들었다. 사실 당시의 박명수의 인기는 A급이라고 하기는 애매한 편이지만 대중 인지도가 매우 높은 편이긴 해서 약간 과장해서 A-급이라 할 수 있다.] 즉 지금처럼 2번의 연예대상 출신의 예능인으로서 최정상급의 인지도를 가진 톱스타라는 의미에서는 과거에는 인기 있는 연예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고, 상당히 인지도가 있는 연예인이라는 의미에서는 초창기부터 예전부터 인기가 있던 연예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20대 때부터 길거리에서 사인공세에 시달렸고, [[김구라]]처럼 길거리의 일반인들이 거의 못 알아보는 무명 개그맨 시기를 겪다가 데뷔 10년이 넘어서야 유명해진 사람들과는 경력의 차원이 다르다. 2010년대 방송가에만 익숙한 사람들도 알 수 있게 예를 들자면 [[아는 형님]] 초중기까지의 [[김영철(코미디언)|김영철]]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개그맨 활동을 통해 인상깊은 캐릭터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예능에 진출했고, 기복이 심해 패널은 자주 맡지만 메인 MC 급은 아니며, 어디에 투입되건 기본적으로 비호감 캐릭터를 담당하는 점에서 그렇다. 모르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호감도가 높은 연예인이냐 하면 "글쎄?" 하게 되는 정도. 즉 인기 프로그램에 고정 내지 준고정으로 활동할 정도의 인지도를 갖추고, 프로그램 초기 방향성을 잡는 단계에서 활기를 불어넣을 정도의 캐릭터도 있지만 그렇다고 프로그램의 메인 MC나 주요 출연진을 맡길 정도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웃음을 주는 능력 자체로 본다면 '화내는 개그'라는 본인 주도 하의 트렌드를 만들어내기도 한 박명수가 김영철보다는 훨씬 좋은 편이다.] 이처럼 박명수는 데뷔 초기에는 유재석보다 인지도가 높았다. [[무리한 도전]] <암산왕과의 대결> 편(2005.12.10)중 유재석이 데뷔 선배[* 의외로 많은 이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유재석은 1991년 KBS 공채 7기로 데뷔했으며 2021년 현재 데뷔 만 30년이 넘었다. 7기 동기로 '''[[김국진]], [[김용만]], [[박수홍]], [[남희석]]'''이 있으며 2000년, 2010년대 동시대에 활동한 어지간한 코미디언들을 짬밥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할 정도이다. 참고로 무한도전을 같이 한 KBS 공채 후배인 [[정형돈]]은 17기로 11년 후배다. 당연히 1993년에 데뷔한 박명수보다 2년 선배가 된다. 다만 20살이 되자마자 데뷔한 터라 동갑 혹은 나이가 많은 방송인들 중에서 그보다 후배들이 많아 서로간의 호칭 문제가 꼬여서 불편하기 때문에 그냥 나이로 앞서는 이들에게는 존댓말을 하고 있으며, 동갑내기 후배들하고는 사적으로 말을 놓는다고 한다. 유재석이 박명수에게 "명수형" 이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잘 지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유재석은 가끔 농담식으로 박명수 앞에서 개그맨 선배 드립을 치기도 한다.]였지만 워낙 인기가 없어서 "박명수 닮았다", 혹은 박명수 [[짝퉁]] 취급을 당해서 연예인 생활을 그만두려고 했다고 한다. 무한도전 신년특집인 <초심으로 돌아가자>(2007.01.06) 편에서 출연자들의 신인 시절을 보여주는 코너에서 유재석도 "저(유재석 본인)보다 훨씬 인기가 좋으셨죠?" 라고 인정했다. 이처럼 초기에는 신인으로서 엄청난 인지도를 쌓았지만, 박명수가 무한도전으로 터지기 전까지 그의 주된 유명세와 활약은 대부분 데뷔 초기에 집중되어 형성되어 있다. 콩트 프로그램에서의 활약도 결코 주연급이 아니었다. 주연급을 맡기려 했다는 [[김성원(작가)|김성원 작가]]의 발언도 있었지만, 워낙 말을 더듬는데다가 연기력이 부족하고 그마저도 캐릭터의 폭이 제한되어 있어 이뤄지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90년대에서 이어지는 MBC의 코미디 프로 황금기 때에는 김성원 작가가 메인 작가가 아니었으므로 주연급을 맡기려 했다는 발언이 나온 시점은 결국 [[코미디하우스]] 방영 중일 때인데, 이때 박명수는 데뷔 5, 6년차에서 10년 이상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상당한 고참 개그맨에게 메인을 못 맡겼다는 소리이다. 즉 초창기에는 대박이 확실히 터졌지만 이후 큰 발전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좋은데, 1990년대의 콩트 프로그램에서는 현재의 버라이어티 예능쇼처럼 무작정 한 장면이나 단락적으로 웃기고 그걸 유재석과 같은 중재자가 받아서 잘 정리해주는 게 아니라 일정한 스토리의 틀이나 흐름 속에서 희노애락 등을 나름대로 표현해 가면서 김국진이나 홍기훈, 김진수처럼 기본적인 연기력+반전으로 웃기는 패턴이었기 때문에 대본 소화 능력이 떨어지는 박명수는 자연스레 그 역할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순발력이 중요해진 이후 시점의 코미디 하우스 등에서의 무대에서조차 약방의 감초 역할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상 박명수는 콩트에서는 특이한 얼굴이나 말투를 바탕으로 극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 역할이었다. 종종 회자되는 박명수의 대표 코너 격인 [[코미디 하우스]]의 3자 토론이 대표적인데, 이회창 역으로 출연하며 좋은 활약을 보이기도 했지만 여기에서조차 박명수는 약방의 감초 역할에 불과했다. 코미디 하우스의 대표 코너는 [[정준하]]의 출세작 노브레인 서바이버, [[조혜련]]의 골룸 개그, [[김현철(코미디언)|김현철]]의 1분 논평 등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박명수의 위상을 대략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3자 토론은 코미디 하우스 내에서 반응이 그렇게까지 좋지는 못했던 코너였던 데다가[* 메인 코너였긴 했지만 얼마 후 신설된 노브레인 서바이버의 인기로 인해 메인을 뺏겼다. 특히 방송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만큼 어린 친구들은 이 코너를 개그가 아닌 정치인 토론회로 착각해 채널을 돌린 적도 적지 않았다고...] [[노무현]]을 모사하던 [[배칠수]]의 활약이 더 좋았기 때문에 자주 편집되기까지 했다. [[개그콘서트]]의 부흥과 함께 콩트 프로그램은 몰락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MBC 소속 개그맨들은 둥지를 떠나 다방면에서 활동하게 된다. 박명수는 [[공감토크쇼 놀러와]] 등에 출연하며 MBC와 연을 잇는 한편 KBS와 SBS에도 게스트 출연을 이어갔지만 후술할 리얼버라이어티 붐 이전까지 상당한 침체기를 보내게 된다. 패널 역할로 많이 뛰기는 했지만 비슷하게 패널 역할로 많이 뛰었고 이따금씩 케이블 MC나 지상파 꼽사리를 끼는 김태현을 보고 인기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 역시 박명수의 이 당시 인기라는 것은 미묘한 부분이 있다. 흔히 박명수가 방송에서 이야기하던 사업의 집중기가 바로 이때이다. 그러다가 방송의 시류가 리얼버라이어티 및 예능으로 바뀌게 되었고, 강렬하면서도 밉지만은 않은 캐릭터를 갖고 있었던 박명수는 [[공감토크쇼 놀러와]], [[X맨을 찾아라]]와 무한도전을 통해 비로소 대세라고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리얼버라이어티 초창기 박명수가 제창했던 '제8의 전성기'라는 표현은 평소 꾸준히 잘 나갔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라, 어떻게든 개그계에서 끈질기게 버텨왔다는 자괴감을 개그 소재로 승화시킨 기믹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꾸준히 잘 나갔으면 전성기가 8번 오는 게 아니라 1번의 전성기가 쭉 계속 되는 것이다. 박명수 본인이 음반 활동에 집중했던 것도 당대 행사 진행에서 개그맨이었던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한 요소였다. 나이트 행사를 진행하면서 본인은 한 시간이나 붙어있어야 비로소 출연료를 지급받는 것과 달리 가수는 잠깐 방문해 한두 곡만 부르고 가 버림에도 불구하고 페이가 더 세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예 내가 진행하고 내가 노래하겠다는 식으로 나왔던 것.[* 그래서 앨범이 자꾸 망하는데 왜 계속 내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어차피 다른 데에서 써먹기 때문에 망해도 망한 게 아니라고 답한 바 있다. 히트곡이 되면 좋겠지만 실패해도 본인 행사에서의 레퍼토리는 늘어나기 때문.] 실제로 박명수의 앨범의 구성을 살펴보면 행사 음악용 구성이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클럽 음악에 진출하게 된 현재 시점에서도 마찬가지. 2000년대 중후반이나 되어서야 개가수가 비로소 자리를 잡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인상적이다. 이렇게 버라이어티 예능 전성시대가 오기까지 캐릭터에 큰 변경이 없는 박명수의 흥망성쇠는 2000년대 방송의 개그 프로그램 트렌드의 변화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본인에게 한계가 있는 콩트라는 장르는 명백히 몰락하고 있었고, 인지도는 어느 정도 있지만 방송사를 대표할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개그맨들은 소속 방송사라는 둥지를 떠나 활동하기 시작한다. 박명수 역시 그러한 개그맨의 하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만의 개성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던 박명수는 무한도전과 X맨에서 출연과 하차, 재투입을 거듭하여 리얼버라이어티에 적응해냈고 이윽고 대표 예능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리얼버라이어티의 선봉장에 위치한 것이 무한도전인 점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박명수를 논함에 있어 [[유재석-박명수 콤비]], [[하와수]], [[신구데블스]] 등 유재석, 노홍철, 정준하 등의 요소들과 무한도전 전후는 커다란 기점임에는 분명하다. 2006년 4월 3일 한국코카콜라 환타가 서울 시내 중고생 568명을 대상으로 '스승의 날에 1일 선생님으로 학교를 방문해 주기를 바라는 연예인' 설문조사를 했는데, 박명수가 '''1위'''를 차지했다. 당시 박명수는 [[X맨을 찾아라]]와 [[공감토크쇼 놀러와]], 강력추천 토요일[* 독립 이전 '''[[무한도전]]'''이 속해있던 코너이다.]에서 호통개그, 복식개그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위로는 [[타블로]], 3위는 [[신정환]], 4위는 [[정형돈]], 5위는 [[조혜련]]이 각각 뽑혔다. [[https://sports.chosun.com/news/news_o2.htm?name=/news/entertainment/200604/20060404/64d70032.htm|#]]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