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마리아 (문단 편집) == 생애 == 1906년 4월 19일 [[강원도]] [[강릉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 박명삼(朴明三)을 잃고 홀어머니 고의대(高義大) 밑에서 힘들게 자랐다. 어려운 환경에서 목사의 도움으로 경기도 [[개성시|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해 졸업했는데 이미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부터 [[공창]](公娼)제의 폐지, 금주, 금연 등 계몽적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사회운동가, 신여성, 야망가로서 성향을 드러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32년 [[테네시]] 주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 미국 남부의 명문 대학이다. [[아이비리그]] 급의 수준을 자랑한다.]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테네시 스칼렛(Scarlet)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오류도 있는데 정확하게 밴더빌트가 맞다. 스칼렛 대학은 미국 전역에 하나도 없고 테네시의 스칼렛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뿐이다.] 사실 이 시대 해외 [[유학생]]의 공통점은 현대의 유학과는 비교도 안되는 압도적인 가문의 재력이 뒷받침[* [[이병철]], [[신격호]], [[이승만]], [[서재필]] 등이 그러하다.]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박마리아의 대학과 [[대학원]] 유학은 장학 제도가 아예 없던 [[일제강점기]]에 비교해 보면 이미 떡잎부터 다른 능력을 보였다.[* 조선시대 때에는 [[국비유학|관비유학]] 제도라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인 [[김란사]]가 이 제도를 이용하여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이는 '이기붕을 박마리아가 만들었다'는 평가의 방증이다. 귀국한 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고 1935년 [[이기붕]]과 [[결혼]]함과 동시에 이때부터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 장남 이강석, 장녀 이강희[* 이화여자중학교 재학 중에 [[요절]]했다.], 차남 이강욱을 낳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이들은 전국을 돌면서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면서 [[정신대]] 모집과 국방헌금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행위 덕에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이승만과 [[8.15 광복]] 전에 연을 맺었던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 무렵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과 불화가 있었는데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 관계다, 임영신이 안주인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등 [[소문]]이 났다.[* 보통 해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 시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았다.] 그게 해외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킨 틈을 타서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목을 형성해[*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어는 한 마디도 못 해서 남편인 이승만과도 영어로만 대화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이기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을 지내면서 탄탄대로를 걸었고 1951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나름 깨끗하게 처리하면서 인기를 끌어 자유당 의장 자리에 올랐으며 드디어 [[권력]]의 최중심에 안착했다. 박마리아 본인은 남편의 권력을 기반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이 되었는데 탄탄대로를 걸으면서 남편을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이기붕은 [[제3대 대통령 선거|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하며 부통령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1957년 이기붕과 함께 장남 [[이강석(1937)|이강석]]을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켜 이승만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남편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들을 총동원했으며 대한부인회는 전국 대회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3.15 부정선거]]를 감행하면서 결국 [[4.19 혁명]]이 터지고 1960년 4월 26일에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하면서 다음 날인 4월 27일에 하야하자 이기붕 일가의 최후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1960년 4월 28일 아들이었던 이강석 당시 육군 [[소위]]에 의해 일가족이 모조리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이강석도 [[자살]]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 책임자인 [[곽영주]] 경무대경찰서 서장이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국민 [[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거나 이승만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하지만 애당초 타살론 자체가 [[무풍지대(드라마)|무풍지대]]에서 [[이환경]]이 지어낸 썰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