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노해 (문단 편집) === 1990년대 사형 구형, 무기징역 선고 === 이후로 박노해는 시인이자 노동자라는 이름에 투쟁가를 더하게 되는데 1985년 [[김문수]], [[심상정]]과 함께 공개적인 노동자 정치조직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 여담으로 이곳에는 [[유시민]]과 만화가 이은홍 화백도 있었다.]을 창립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서노련이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자 [[백태웅]] 前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1989년 비공개 지하조직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을 결성하였다. <노동의 새벽> 출간 이후 무려 7년여의 수배 생활 끝에 1991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체포됐다. 24일간의 고문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으로 선고되었다. 박노해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사형장에서 사라지더라도 더 많은 박노해가 나타나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주길 바란다."[[https://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343005.html|전문]]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93ebe327ba7d8dcee80d373e50ba217f.jpg|width=100%]]}}}|| || {{{-1 1991년 사형을 구형받고}}} ||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7년 6개월 만에 [[출소]]했다.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옥중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부터 출소 이후 박노해가 보인 행보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 전반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일부에선 변절이라고 공격하고, 또 일부에선 진화이자 성장이라고 옹호하였다. 그는 <노동의 새벽> 출간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