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금철 (문단 편집) === [[갑산파 숙청 사건|몰락]]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갑산파 숙청 사건)] 한편 박금철은 김일성을 우상화는 과정에서 갑산파 우상화도 은근슬쩍 시도하였다. 빨치산 회상기가 연재되기 시작할때 갑산파들도 여기에 꼽사리를 끼었으며 박금철이 서대문수용소 수감 시절에 그를 뒷바라지한 부인 서채순의 충절을 찬양하기 위한 영화 <일편단심>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김정일]]이 대체 누구를 위한 일편단심이냐고 문제를 제기하였고 당력사연구소가 박금철을 검열하였다. 그 결과 박금철이 개인 우상화, 지방주의를 조장하였다고 비판받았다. 1966년부터 박금철에 대한 보도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2차 당대표자회에서 박금철은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국 비서가 되었으나 비서국의 설치는 당부위원장의 권한이 비서국으로 분산된 것으로 박금철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임이 명백했다. 비서국 내부에는 [[김광협]], [[허봉학]], [[김영주(북한)|김영주]], [[석산(북한)|석산]], [[최용건]], [[김일(1910)|김일]] 등 김일성 측근들이 대거 진출하여 박금철을 견제하였다. 1967년에 들어서 박금철에 대한 보도는 극단적으로 감소하였다. 박금철은 특히 김영주가 정치위원회 위원 겸 비서가 된 것에 대해서 헌병 똘마니나 하던 김영주가 왜 나대느냐고 격렬히 반발했다고 한다. 1967년 2월에는 박금철과 리효순이 [[허석선]]의 인사 문제로 인해 김일성과 심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내기도 했는데 사실상 그의 마지막이었다. 나이는 김일성과 동년배이기는 하지만 숙청될 당시 50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고, 60년대부터 김일성이 신장결석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리면서 앓아눕고 뒤통수에 달린 혹도 자꾸 커지자, 김일성이 병으로 죽으면 자신이 후대 수령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박금철은 [[목민심서]]를 추천하여 봉건적 실학을 신봉했다는 김일성의 비판을 받게 된다. 여기에 박금철은 어느 순간부터 김일성의 중공업 일변도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슬금슬금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화폐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이를 수정주의로 맹비난했고 거기에 부르주아, 유교 번안풍종자, 지방주의자로 박금철을 비판했다. 1967년 5월 4일, 조선로동당 4기 15중전회에서 갑산파는 김일과 김영주의 협공에 전멸당했고, 이때 박금철은 고향인 갑산에 양옥집을 크게 세운 혐의, 서채순을 혁명가로 과장한 혐의, 24세된 맏딸을 경락연구소에 배치하여 김봉환의 경락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논문을 대필하게 하여 의학박사로 만든 혐의로 공격을 당했고,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자유주의자가 되었다면서 고향에 가서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김일성에게 싹싹 빌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박금철은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갑산농장으로 하방되어 구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루마니아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의 노선을 잘 이해하지 못한 죄로 공장 지배인으로 하방되었으며 반당, 반김일성분자 처분까지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영순의 회고록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에서는 숙청이 결정된 후 주석궁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죽지 못하고 농촌으로 끌려갔다고 쓰여 있다. 나중에 1975년 12월 4일, 김일성은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사대주의, 수정주의사상에 물젖어있은자들인 박금철과 [[박용국(1921)|박용국]]이 우리의 대외사업을 다 망쳐놓았다"라고 다시금 박금철을 부관참시해버렸다. 그리고 그 노동자 생활도 얼마 가지 않아서 1968년 초에 출당 조치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고 1970년대 초반에 사망했다고 한다. 다만 고향 갑산에서는 어느 정도 명망이 남아있었는지 정치위원 강수봉은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중 자신을 붙잡은 노농적위대 지휘관에게 역시 갑산 사람들은 박금철 동무를 닮아서 당성이 충만하다고 하는 도박을 했는데, 조금 전까지 마구 다그치던 지휘관이 씩 웃으면서 태도가 누그러져서 겨우 살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