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금철 (문단 편집) === 권력의 정점 === 김일성이 [[천리마 운동]]을 시작하여 청산리 방법, 대안의 사업체계를 내놓자 이를 후빨하였고 196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15주년 경축행사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한편 북한의 정통성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 활동에 있다고 계속하여 수령제 확립에 기여하였다. 물론 이는 김일성을 도운 자신을 추켜올리는 말이기도 했다. 1961년 2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알바니아 로동당 4차 당대회에 다녀왔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가 다시 정치위원회로 돌아감에 따라 정치위원회 위원 및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이때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찬양하였다. 1962년 6월에는 베이징 시장 펑전의 북한 방문에 대한 답방 목적으로, [[주더]]의 초청을 받고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귀국 후 "공동의 원쑤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피로써 맺어진 조중 량국 인민의 친선 단결은 영원 불멸할것이다"라고 7월 14일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발표했다. 1962년 12월 전원회의에서는 [[박정희]]가 남한에서 파시즘 독재를 수립하느라 정신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한동안 남한이 공격하진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후 국방력 강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경색으로 선진무기를 얻을 수 없게 되자 동독에 접촉해서 알랑방구를 뀌었으나 당연하지만 동독은 이를 묵살하였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3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5월 김일성의 방중도 수행하였다. 1964년 10월, [[최용건]]과 함께 다시 방중, [[마오쩌둥]]과 회담하였으며 1965년 5월, 인도네시아 공산당 창건 4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 [[수카르노]]도 만나고 왔다. 1965년 12월 16일에는 박금철의 부인 [[서채순]]이 죽었는데, 정권의 고위인물도 아닌 그녀를 위한 장의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박금철의 권위는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가 설치되자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는 한편, 부위원장이 비서로 개편되면서 비서국 비서로도 선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