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킹 (문단 편집) === 바이킹들의 쇠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이렇게 스칸디나비아를 중심으로 전 유럽을 휩쓸던 바이킹이었으나 이들 역시 10세기 경에 정점을 찍더니 이후부터 점차 쇠락했다. 10세기 말부터 조금씩 약탈 빈도가 줄어들었으며 11세기 중후반부에는 거의 사라지기에 이른다. 바이킹이 쇠락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아래와 같은 이유들로 요약이 가능하다. >'''1. 해안 방어 체계 정비''' > >'''2. [[농노제]]의 등장으로 인한 노예 무역 효용 감소''' > >'''3. 그리스도교의 스칸디나비아 확산''' > >'''4. 스칸디나비아의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제력 강화''' > >'''5. 기온 하강과 유빙의 증가, 항해 환경의 악화''' 이러한 바이킹의 공격은 당시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바이킹의 공격으로 서유럽의 많은 도시와 마을, 수도원 등이 파괴되고 약탈되었으며, 상당한 인명과 경제적인 피해를 입었다. 당대 서유럽 군주나 영주의 당면과제는 신민을 이들의 침략에서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고, 그 성과에 따라 제 권력이 왔다갔다했기에 머리를 싸매면서 바이킹을 막을 다양한 대책을 강구했다. 서유럽 영주들의 대비책들 중에는 당연히 '''해안 방어 체계 정비'''가 있었다. 곳곳에 바이킹들의 기습을 막을 초소와 기지들이 세워졌고, 특히 분열되어있던 유럽의 왕국들이 통합되고 하나둘씩 안정을 찾으면서 방어체계도 굳건해졌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잉글랜드 왕국]]. 과거까지만 해도 7왕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기에 급급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 되어 더이상 바이킹들이 건드려서 크게 득볼 것이 없었다. 바이킹들은 더이상 기습의 이점을 노릴 수가 없었고 치고 빠지는 싸움방식을 좋아하던 바이킹들에게 이건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중무장을 한 중세 유럽 [[기사]]들이 등장'''하여 해안가에 상륙하는 해적만 보면 말타고 달려와 몸통박치기를 날려댔기에 기존의 보병 방진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바이킹들이 상륙해봤자 기사들 아래에 짓밟히기만 했고 약탈도 점점 시원찮아졌다. 일부 바이킹들은 아예 현지에 정착해 본인들 스스로 봉건기사가 되기도 했는데, 이렇게 현지 사회에 녹아든 바이킹들은 이제 자기 신민과 재산을 지키고자 본토 침략자와 싸웠다. 이렇게 동화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르망디 공국]]. 노르망디 공국은 바이킹 출신이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에 동화되어 누구보다 바이킹들을 막아내는 데에 열심이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약탈형 바이킹들은 동화된 바이킹이든 봉건기사들이든 모두에게 가로막힐 수 밖에 없었다. '''중세식 농노제의 등장''' 역시 바이킹들에게 치명타였다. 바이킹들은 점령지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가서 노예로 팔아넘기는 [[노예무역]]에서 막대한 무역을 챙겼는데, 문제는 농노제가 확립되면서 더이상 노예들을 사줄 고객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농노들이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데 굳이 비싼 돈을 내고 노예들을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 게다가 [[그리스도교]]가 1000년 경에는 스칸디나비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는데, '''같은 기독교도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금지한 교리''' 때문에 노예무역을 하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가장 막대한 이익을 내던 노예무역이 점점 사라지니 바이킹들이 약탈을 계속 해야할 이유가 사라졌다.[* 다만 서유럽에서 로마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아일랜드에서는 서기 12세기까지도 노예 제도가 엄연히 존재했다.]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중앙집권화'''였다. 사실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통제할 중앙권력의 부재 탓이 컸다. 마치 일본의 [[전국 시대]]에 중앙정부의 약화 때문에 [[왜구]]들이 발호했던 것과 같은 원리. 그러나 점차 [[노르웨이 왕국]], [[덴마크 왕국]] 등 왕국들이 발전하고 힘을 갖추면서 바이킹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바이킹들은 과거처럼 날뛸 수가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스칸디나비아 일대가 안정을 찾으면서 바이킹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 외에 환경 악화도 문제였다. 특히 11세기에 정점을 찍었던 '''온난한 기후가 다시 악화'''되어 점차 소빙기 기후로 변해갔다. 그린란드는 더 이상 푸르를 수 없었고, 바이킹의 주 근거지는 유빙 탓에 항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린란드의 바이킹 정착지들은 15세기 이후엔 완전히 사라진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attle-of-stamford-bridge.jpg|width=100%]]}}} || || '''{{{#40E0D0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40E0D0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 일반적으로 '바이킹 시대' 자체는 1066년 노르웨이의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영국 침략에 실패하면서 바이킹 시대가 끝났다고 본다.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가 명확한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왕위계승다툼이 일어났는데, 이 경쟁에서 밀려난 노섬브리아 백작 토스티그가 앙심을 품고 노르웨이의 [[하랄 3세 하르드라다|하랄 3세]]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하랄 3세는 무려 300여 척의 선단과 9천 명의 병사를 모아 잉글랜드로 쳐들어갔고,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 2세]]와 격돌했다. 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바이킹 군대가 괴멸하면서 바이킹들은 더이상 외세를 침공할 여력을 잃어버렸고, 이를 274년에 걸친 바이킹 시대의 종결로 친다. 가장 일반적인 종결 기준은 위의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지만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 1030년 스티클스타드 전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기독교도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는데, 이때 이후의 노르웨이인들은 더이상 '바이킹'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스웨덴]]은 995년부터 1020년까지 재위한 올로프 솃코눙 왕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바이킹 전통을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후까지 바이킹 신앙을 유지하던 [[아이슬란드]]마저 기독교로 돌아섰고 스칸디나비아 전체가 기독교화되면서 바이킹은 저 시골벽지로 들어가지 않는 한 더이상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버렸다. 아일랜드의 경우 바이킹들의 도시였던 [[더블린]]이 1171년 함락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최후의 바이킹 왕 하콘 하코나르손이 1263년 패배하며 바이킹 왕국들의 계통이 끊어진다. 이후 스코틀랜드 곳곳에 남아있던 소규모 바이킹계 세력들은 꼼꼼하게 살해당하거나 동화되었고, 15세기에 이르면 스코틀랜드에 바이킹의 영향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헤브리디스 제도]]나 [[맨 섬]]처럼 본토와 바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군도나 섬은 1266년까지 바이킹 통치 하에 있었다.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는 1469년까지도 노르웨이 국왕 소유의 섬들이었는데, 그래서 바이킹 시대가 넓은 의미에서 15세기에 종결됐다고 보는 견해도 소수 있긴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