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오딩시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중국 바오딩.jpg|width=540]] 1250년에 세워진 다치거 (대자각 大慈阁)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당시 유적인 난좡더우 유적(南庄頭遺址) 및 댜오위타이 유적(釣魚台遺址)[* [[센카쿠 열도]]와는 일절 관계 없으며, 그냥 이름만 같은 곳이다.], 야오좡 유적(要庄遺址)이 여기서부터 [[화베이유전지구]]까지 이어져있다. 하상시대에는 부산(釜山)[* 댜오위다오와 비슷하게, [[부산광역시]]하고 한자까지 같지만 역시 관련없다.]이라고 불리었으며, [[요(삼황오제)|요]] 황제의 고향으로 내려오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부터 [[조(전국시대)|조나라]], [[중산국]]이 이 땅을 통치하였으며 바오딩에는 연나라의 별도(別都)[* 일종의 비상수도다.]인 연하도(燕下都)가 위치해 있었다. 이후 [[진(영성)|진나라]] 시기에는 상곡군(上谷郡), [[한나라]] 시기에는 중산군(中山郡)과 탁군(涿郡)[* 유비가 태어난 탁군이 이쪽.] 소속이었으며 [[북위]] 시기에는 북평군(北平郡) 관할로 있었다. 581년 [[수나라]]는 이 곳의 이름을 청원(淸苑)으로 바꾸었는데 이 이름은 1958년 청원현(清苑縣)이 폐지될 때까지 쓰였고, 2015년 구(區)의 이름으로 부활하였다. [[송나라]]시기에는 나름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바오딩에 [[조광윤]]의 [[조부]]인 송 익조 조경(趙敬)의 능인 정릉(靖陵)이 위치 해 있기 때문이었다. 해당 능은 현재도 그대로 있으며, 현재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있다. [[금나라]] 시기에는 순천군절도사(顺天軍節度使) 관할지역었다. 이후 [[명나라]]가 바오딩에 보정부(保定府)를 설치하였고, [[청나라]] 때에는 더욱더 중요해져서 직례성(直隷省/현 [[허베이성]]河北省)의 중심지가 되어 1958년까지 성도(省都)의 역할을 했다. 또한 [[옹정제|옹정]] 연간에 지어진 유명한 도서관인 연지서원(蓮池書院)에서 알 수 있듯 행정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국사와의 관련점으로는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끌려와 유폐되기도 한 곳'''이 바로 여기다. 철도가 도입되고는 1905년 개통된 경한철도(京漢鐵道: [[베이징]]~[[우한시|우한]])가 통과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직례성의 치소였으며, 중일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중공 정권]]이 수립되고 나서도 [[톈진]]이 직할시로 승격되고 [[스자좡]]으로 성도가 옮겨지는 1958년까지 허베이성의 성도였다. 바오딩은 [[인민해방군]]의 제 38 기계화 사단의 주둔지이기도 하며, 풍력 발전 단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 공업 도시로서 중국 최악의 [[스모그]]로 악명높은 곳이다. 시가지를 두른 6km의 명대 성벽과 연지서원, 그리고 도시 인근의 [[청서릉]] (청동릉은 [[탕산]](唐山)에 위치한다)이 유명한 관광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