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둑 (문단 편집) === 일본 === 한편 일본 [[정창원]](쇼소인)에는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木画紫檀棊局)과 바둑알인 감/홍아발루기자(紺牙撥鏤棊子, 紅牙撥鏤棊子) 세트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화점 수만 제외하면[* 현재 사용하는 9화점이 아닌 16화점식의 바둑판이다. 19x19인 것은 현재와 같다.] 현대에 쓰이는 바둑판과 형태가 동일하고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바둑 세트로 알려져 있다. [[백제]]의 [[의자왕]]이 선물로 보냈다고 알려져 있으며[* 756년에 작성된 [[토다이지]] 헌납기록(東大寺献納目録)에 백제 의자왕이 당대 중신이었던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일본의 일부 혐한들은 이 기록을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거짓말로 치부하기도 한다.] [[쇼토쿠 태자]]가 애용했다고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둑알 색이 현재처럼 흑백이 아닌 빨간색과 감색(짙은 파랑색)이며 바둑알 하나하나에 꽃과 새를 새겨넣어서 예술적 가치도 높다고 한다. 바둑이 본격적으로 근대바둑으로 발전을 하기 시작한 것은 종주국인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부터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거물들이 바둑을 좋아하였으며 그 결과 국가 차원에서 바둑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예나 지금이나 동아시아권에서 게임이라는 장르가 가장 득한 나라가 일본이다. 과거부터 일본인들은 테이블탑 형태의 게임에 몰두했고 지금도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게임개발,판매강국이다. 도박부분도 포함하여 예로부터 일본인들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의미로든 게임에 크게 심취한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를 수립한 뒤 바둑을 무사들에게 가르치는 기소(碁所)라는 관청을 수립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도는 [[전쟁]]이 끝나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에게 바둑을 두게 함으로써 관심을 돌리려는 생각이었다. 이 기소의 최고 책임자를 임명하는데 이 책임자(기소 명인)는 당대 바둑의 최고수여야 했다. 기소 명인의 녹봉은 당대 [[영주(중세)|영주]]급인 데다 기소 [[명인]]이라는 [[칭호]]에 대한 매력 때문에 당대 바둑 고수들은 사활을 걸고 바둑 실력을 연마하였고 그 결과 이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4개의 바둑 가문이 성립이 되었는데 그들은 [[혼인보]], [[이노우에]], 야스이, [[하야시]]였다. 네 가문이 기소 자리를 놓고 수백 년 간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바둑은 급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 결과 현대 바둑의 이론이 정립되는데 즉 귀에 선착→변으로 발전→중앙으로 진출이라는 것이라든지 세력, 실리의 구분, 정석 등등이 거의 현대 바둑과 유사한 경지에 오르게 된다. 특히 이러한 막부 시대의 일본 바둑 [[기사(바둑)|기사]]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기사(바둑)|기사]]로는 혼인보 도사쿠가 있다. 도사쿠는 당대 13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당대 최고수들을 모두 선 치수 이하로 접을 수 있는 실력자였다. 또한 도사쿠는 돌이 서로 얽혀있는 과정의 효율을 매우 중시하였고 따라서 이미 놓여져 있는 돌들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 식의 새로운 방식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막부 시대에서 도사쿠 이외에 널리 알려진 [[기사(바둑)|기사]]는 혼인보 슈사쿠로 그는 [[히카루의 바둑]]의 소개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는 어성기라 불리는 막부 앞에서 두는 바둑에서 19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다만 그는 기소 명인이 되지는 못했는데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망시 七단이었고 따라서 명인(=九段)이나 기소(슈사쿠의 스승인 조와 이후 공석)가 될 수가 없었다.(또한 엄밀히 말하면 혼인보도 아니었다. 후계자로 지명된 상태에서 사망하였으므로.) 슈사쿠의 19연승은 당대 최고수를 상대로 한 것이며 아무리 1인자라 하더라도 한두 판은 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보기 힘든 대기록이다. 물론 이창호 역시 프로 [[기사(바둑)|기사]]들 상대로 41연승의 기록을 세웠으므로 불가능한 기록은 아니다.[* 현대바둑 최대 연승기록 1, 2, 3위가 전부 [[한국기원]]에 있다. 1위 [[이창호]] 41연승, 2위 [[김인(바둑)|김인]] 40연승, 3위 [[이세돌]] 32연승. 이외에 30연승 이상 한 현대 프로기사는 한중일대 통틀어서 단 한명도 없다.] 또한 당시엔 시간 제한이 없이 물 쓰듯이 시간을 쓸 수 있었으므로 현대 바둑에서 볼 수 있는 [[초읽기]]로 인한 착오 등이 적었다. 때문에 보다 정밀한 대국이 가능하였고 따라서 자기보다 실력이 떨어진 [[기사(바둑)|기사]]들을 상대로 전승을 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무난하였다. 선수인 흑이 유리하기에 덤을 주고 시작하는데 당시엔 덤이 없었다. 즉 비슷한 실력이면 덤 없이 흑돌 잡고 무조건 이긴다고 봐야 한다. 당시 바둑 연구가 덜 된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것. 그 뒤 막부가 붕괴되자 기소가 없어져 4개 가문은 직격탄을 맞았고 그 결과 각 가문들은 해체되는 수순을 맞는다. 그 뒤 각 가문 출신들의 고수가 모여 [[일본기원]]을 수립한 뒤 신문사를 스폰서로 하여 혼인보라는 타이틀전을 개최하여 현대 바둑 선수권전(챔피언전)의 효시가 된다. 이들 일본 [[기사(바둑)|기사]]들은 한국과 [[대만]] 등에도 건너가 활발히 보급하였는데[* 조선 말 유행한 [[순장바둑]]과 다른 일본룰식 바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초반 포석 쌓는거 외엔 두 룰간 차이가 엄청 큰건 아니지만.] 이때 한국 최고수와 일본 프로 [[기사(바둑)|기사]]와의 치수는 석점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