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주주의 (문단 편집) === 근대~현대 민주주의 === 현재의 민주주의는 17세기 계몽 사상가인 [[존 로크]]의 자연권 사상과 이의 뒤를 이은 18세기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드니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1688년 [[명예 혁명]], 1776년 [[미국 독립전쟁|미국의 독립혁명]]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이른바 '3대 시민 혁명')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와는 구분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사상이 발달하였으며, 이는 오히려 직접 민주주의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에서의 대의제 옹호 논점이 미묘하게 달랐는데, 프랑스의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시에예스]]는 산업이 발달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정치 역시 분업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대의제를 옹호하였으며, 미국의 매디슨은 다수의 전제를 막는 기제로서 대의제를 옹호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유럽 정복과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을 통해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으나, [[빈 회의]] 이후 복고주의적인 옛 귀족 및 자본가 계층과 민주주의를 완전히 쟁취하려는 시민과 노동자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 당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중우 정치에 대한 우려와 참정권 확대에 대한 반대 등으로 현재만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확대된 선거권의 경우에도 경제적으로나 대상자 차원에서 상당한 제약이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성격이 강했다. 1848년 혁명 등을 비롯하여 19세기를 '민주주의의 확산' 시기로 보는 시각이 강하지만, 19세기는 오히려 [[나폴레옹 3세]]의 전제정, [[독일 제국]] 등이 세워지는 등 반동적인 움직임도 상당한 시기였다.[* 프랑스 2월 혁명의 산물이었던 보통 선거권이 결국 나폴레옹 전제를 이끈 역사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당시의 전제 군주제 국가들은 4개의 제국을 무덤으로 끌고 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왕정이 붕괴하면서 대개 민주정으로 전환하였다. 첫 번째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을 비롯해 패전국에서 떨어져 나온 식민지들 또한 왕정의 기반이 무너진 곳이 많았으므로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시기 선진국에서는 여성 참정권 또한 발달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에는 이러한 민주 정책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고, 이러한 민주주의의 확산은 각 식민지 독립 운동의 자극제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에도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을 뿐, 그 내용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보기 힘들다. 상당수의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의 난립과 1년을 채 넘기지 못하는 정권의 유지 기간 등으로 인해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들끓었다. 특히 새로이 민주주의 국가로 합류한 동유럽은 민족 분규가 심각했으므로, 의회 민주주의는 각 민족과 지역, 정파 등이 어지럽게 섞여 자기 목소리만 낼 뿐인 공간으로 보였다. 입법부에 대한 회의는 '손쉽게 의견과 결정을 통일할 수 있는 강력한 행정부'에 대한 열망으로 변하였으며, 특히 [[러시아 내전]]과 [[세계 대공황]] 이후 방향 잃은 경제와 난파하는 내각들은 계획 경제 체제로 갈피를 잡은 '파시즘' 세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에 호응하는 사람들을 출현시켰다. 그 결과 [[http://www.uiowa.edu/~c016003a/dictatorships.gif|1938년 시점의 민주주의는 독재적 통치에 압도당했고]], [[나치]]나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인 국가주의 사상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때 나치즘과 파시즘은 추축국의 시민들을 선동하여 결과적으로 ''''민주적'으로 보이는 도구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확산에 따른 중산층의 불안감과 극우적인 사상의 유행으로 인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탈산업사회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은 파시즘의 등장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해석에 대해 귀족주의적이며 경험적 근거 없이 대중의 판단력과 취향을 비하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 역시 파시즘의 대두는 심각한 불평등 때문이었지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었다는 반론을 제시한다. [[권위주의]] 개념을 창안한 스페인의 정치학자 후안 린츠 역시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는 의사결정권을 독점한 극소수 권력자들의 음모와 협잡에 의한 것이지 민주적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노동 계급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이에 대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선 민중의 정치 참여'가 양차대전으로 인한 전시 동원과 공업 노동의 활성화를 거치며 노동 계급의 성장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베링턴 무어는 민주주의 이행에 있어서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 는 유명한 테제를 통해 부르주아 계급의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디트리히 뤼시마이어는 광범위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무어의 테제를 비판하며 민주주의 이행에서 노동자와 중산층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뤼시마이어에 따르면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을 해소시키고 연합을 하였을 때 이루어진다. 이는 부르주아 계층을 배제하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해석이다. 그러나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에 따르면 1차 대전 이후 등장한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서 당시의 대중들은 수많은 당의 대립과 대공황 이후 방향을 잃은 정권 등으로 인해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이들은 중산 계층으로서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공산주의 이념에는 거부감을 느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행정부의 권력이 크게 집중되는 정부 형태를 원한 것이 결과적으로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또한 전체주의에 대한 수정주의적 혹은 신문화주의적 시각에서는 집회, 대중 동원, 건설 산업 등을 통해 전체주의 정치가들이 대중의 호응을 얻어냈다고 파악하고 있다. 대중들에게는 실업이 가득했던 공황의 시대에 비하면 어찌되었건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던 전체주의 체제가 매력적으로 보였으며, '개인의 자유'를 '대공황을 불러오게 된 방종'으로 파악하게 되면서 민주주의는 변질되고 쇠퇴했다는 것이다.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전체주의 사상의 등장과 2차 대전은 어찌되었건 사회 일반 구성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사건이다. 이들이 민주주의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체주의 이념의 만행을 [[반면교사]]로 삼아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되고 서구 열강 하에 있던 [[식민지]]가 독립을 하면서 민주주의 사상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으나, 진로는 각기 달랐다.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 [[대만]]은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반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2차 대전 이후에도 남아있던 식민지들은 '독립 영웅'이나 기득권자였던 백인의 주도로 독립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소수 중심의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력이 떨어져 다수가 '[[신대통령제]]'로 불리는 독재 정권으로 이행하였다. 이외에 공산권에서도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울 것을 표방하고 식민지 해방 운동이 벌어졌으나 정권 성립 이후는... [[현실은 시궁창]]이 되어 버렸다. 소련에 의해 점령된 동구권에서는 인민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나름대로 합법적 선거를 통해 공산당의 집권을 기도하였으나, 선거에서 불리하면 선거를 무시하고 권위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기존의 전제정 아래에 놓여 있던 시민들의 무관심 및 무지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서 독재로 변질되는 나라가 지금도 상당히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