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주자유당 (문단 편집) === 집권에서 개명에 이르기까지 ===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도 이루지 못했던 전체 의석의 '''2/3'''를 확보했다. 그랬기 때문에 [[1990년]] 당시에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자민당의 55년 체제처럼 "90년 체제"가 이루어질 것이란 분석이 상당히 우세했다. 마땅한 차기 대선 후보가 없는 민정당과, DJ나 YS와의 정면승부에서 승산이 없는 JP는 내각제에 적극적이었지만, 내각제 개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태우와 김종필, 김영삼은 합당 당시 [[의원내각제|내각제]] 개헌을 하기 비밀리에 약속했으나, 김영삼은 합당 직후 당초의 약속을 깬다. 내각제 합의 비밀 문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언론에 유출되어 내각제에 반대하던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김영삼은 자신이 내각제를 하겠다고 합의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히며, 내각제를 할 수 없다고 표명한 것이다. YS가 3당 합당에 찬성한 이유가 DJ와 후보 단일화 문제로 싸우기 싫었던 것임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었던 것.[* JP는 훗날 YS와 결별하고 DJ측과 연합하면서 다시 내각제 개헌을 공동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하나,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다. 이건 사실 DJ측도 내심 바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넘는 의석을 움켜쥐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합당하고 나서도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의 계파 갈등이 상당했다. 이를 두고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민당처럼 하하호호하기에는 기존 지지층의 차이도 너무 컸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하며 김영삼을 지지하던 민주당 지지층과 반공, 경제발전을 이유로 민정당을 지지하던 민정당 지지층간의 간격이 너무도 컸고, 공화당 지지층들도 민정당과 그냥 합당하기에는 뭔가 꺼림직한 것은 매한가지였던지라 지지층의 화학접 결합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날치기가 심심하면 벌어진데다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나고 더군다나 물가상승률마저 높아졌기에 [[1990년 재보궐선거|1990년 양대 재보궐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1991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기초의회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생각보다 선전을 거두었고,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막판 계란 투척 사건과 야권 단일화 실패, 투표율 저조로 광역의원 선거에서 564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그러나 공천 잡음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자 난립 + 군 부재자 투표 부정사건 + 안기부 흑색 선전물 배포사건이 겹쳐지면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9석만을 확보하며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다.[* 총선 직후 무소속 의원 영입으로 14대 국회가 개원할 때는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였다.][* 사실 자민당도 처음 선거인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125석 가운데 고작 61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기는 했다. 다만 참의원에서 별개의 교섭단체인 추풍회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지지세를 굳히는데 성공, 장기 집권의 길을 열게 되었다.] 한편 1992년 10월 2일, [[김종필]] 대표위원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민주연합]](IDU) 당수회의에 참석, 가입의결을 받고 수락연설을 하면서 정회원이 되었고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을 거쳐서 2020년 현재 국민의힘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정계와 공화계 중 일부가 [[이종찬(1936)|이종찬]]을 중심으로 [[새한국당]]을 창당해서 독립했다. 이종찬과 같이 당을 나간 사람들은 특히 YS에게 원한이 컸던 '''[[박철언]]''', 이 외에도 '''[[김용환(1932)|김용환]]''', [[장경우]], [[이영일]]이 있었다. 다만 일부는 다시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새한국당 잔류파는 이종찬을 따라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이후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주영]]이 조직한 [[통일국민당]]에 압력을 넣어 붕괴시키면서 이들 중 일부를 끌어들여 안정 과반 확보에도 성공한다. 1994년 12월 19일 여의도연구소 재단의 설립을 발표하고 21일 당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시기에 김영삼은 [[통일민주당|민주계]]의 부족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재야세력 및 운동권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대표적인 정당이 바로 1992년에 해산된 진보정당인 [[민중당(1990년)|민중당]]이다. 1994년 민중당의 지도부였던 [[이우재(1936)|이우재]], [[이재오]], [[김문수]]가 입당하였다. 이외에도 [[김성식(1958)|김성식]], [[정태근]]의 경우 민중당에 이어 [[통합민주당(1995년)|2차 꼬마 민주당]]을 거쳐서 [[한나라당]] 창당 때 합류했으며, 그외 [[박형준]], [[김용태(1968)|김용태]], [[신지호]], [[차명진]], [[임해규]] 등이 존재한다. 이름만 들어보면 알겠지만 2020년대 현재 보수정당 내부에서 중량감이 있는 인물들이다. 일부는 지나치게 우경화되어서 강경우익이 되었지만 상당수가 [[중도주의|중도]]~[[중도우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개혁보수의 원천이자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스펙트럼이 너무 커져서 계파로서 의미가 없지만 민중당계로 불러도 될 정도다. 한편 재집권 후 YS계와 JP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각종 당직에서 JP계가 축출되자 1995년 2월 김종필을 위시한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그리고 1995년 2월 3일에는 여의도연구소 재단법인의 설립을 허가받으며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정당연구소를 세웠고 4월 15일에 개소했다. 이 연구소가 2013년에는 [[여의도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2020년 현재 [[국민의힘]]의 정책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생겨나며 처음으로 치른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15개 광역단체장 중 5곳만을 건지고, 서울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은 물론 [[강남구]]와 [[서초구]]를 제외한 모든 구청장을 내주면서 패배한다. [[1995년]] 11월 하순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노태우가 구속되고, 김영삼의 대선 자금과의 연관성을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자, 당 쇄신 및 다음 총선을 대비하고자 당명을 바꿀 것을 검토한다.[* 이때는 아직 5.18 특별법 제정을 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전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230020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1-23&officeId=00020&pageNo=1&printNo=23034&publishType=00010|#]] 이후 12월 들어 '''[[5.18 민주화운동#s-10.1|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한 후[* 현역 민자당 국회의원이었던 [[허삼수]], [[허화평]], [[유학성]]도 구속되었다!!]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 중에 민정계와 공화계는 민주계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반면 민주계는 김영삼을 따라 들어오거나 영입된 몇몇 인사들에 불과했다. 이후 1995년 연초에 김종필과 김영삼 양자 간의 갈등이 지속되자, 일부 민정계와 공화계가 이에 가담해서 당을 나갔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를 중심으로 해서, 8선의 [[박준규(1925)|박준규]] 등의 대구경북권의 민정계와 충청권의 공화계 상당수가 짐을 싸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후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했던 세력들이 [[신민당(1994년)|신민당]]으로 간판을 갈았다가, 다시 자민련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처남인 김복동 의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의 다수는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는데 수많은 민정계가 아직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다. 흥미로운 건 민자당이 간판을 내리자 자민련은 쾌재를 부르며 "정통 보수" "원조 보수" "민자당 적통"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사실 자민련은 창당 전에도 민자당이 통일한국당으로 당명 개정을 추진하자 그럼 우리가 민자당으로 창당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민자당은 당명 유지를 선언했다. 이 시기 당명 변경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동시에 개혁공천[* 혹은 민정계 몰아내기]과 함께 '''민정계 중심+민주계, 공화계의 1강 2약''' 구도는 '''민정계 대거 탈락+민주 중심'''의 구도로 바뀐다. 당시 [[신한국당]]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으나 수도권에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1995년)|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했다.[* 00년, 04년 총선에서도 계속 진행된 이런 '탈민정계' 흐름은 16대 국회에 당선된 소위 민정계 의원이 이상득, 박희태, 강재섭 등 소수였다는 것으로 잘 드러난다. 한편 공화계 역시 지역들의 표심 변화와 탄핵 역풍으로 쇠퇴하게 되어, 17대 국회에서 자민련은 4석의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15대 총선]] 이후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민정계는 점점 쇠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