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주노동당 (문단 편집) ===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분당(2004~2008) === 사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위기라고 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비록 [[조승수]] 의원이 애매한 선거법 위반 판결로 의원직을 잃고 이어진 재보궐선거에서 의원직 사수에 실패했지만[* 이 판결은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탄원서를 써 주기도 했다. 당장 그 원조 강경 보수로 유명한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이 탄원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점차 규모를 키우며 나름대로 잘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속은 조금씩 곪아들어가고 있었는데, 바로 진보 진영의 해묵은 과제인 [[NL]] 정파에 의한 분란이었다. NL 계열 제(諸)정파들은 원래 진보정당 운동에는 대체로 큰 관심이 없었지만[* NL계열 중 대중노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舊전국연합이 명목상으로는 국민승리21 시절부터 진보정당운동을 지지하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민주노동당 초기부터 참여한 건 김창현으로 대표되는 [[울산연합]] 정도였다.] 예상과 달리 민주노동당이 성장세를 보이자, 2005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입당하기 시작했다. 일단 입당하자 쪽수로는 절대 밀리지 않던지라 유령, 위장전입까지 동원하여 당직을 접수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른 분란은 내부에서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견제할 수 있던 기존 정치인들은 하필이면 당직/의원직 겸직 금지 조항에 따라 당권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17대 총선이 끝난 뒤 3년간, 당내 패권은 NL 계열에게 급격하게 기울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여당 [[열린우리당]]의 몰락으로 귀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노동당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믿었던 울산 지역에서도 기초단체장을 내지 못하는 등, 분명 광역의원 15명(지역구 5명, 비례 10명), 기초의원 66명으로 만족하기에는 분명 아쉬운 결과였다. 하지만 비례 정당 득표에서는 당시 3당이었던 민주당보다 앞선 결과(12%)를 내는 지역도 있었기 때문에 아주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총선 당시의 13% 지지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2006년 말 시작 된 열린우리당의 해체기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만 했다면, 열린우리당 지지층 중 진보 성향의 사람들을 대거 끌어올 수 있었고, 당내 정파 간 불균형도 해소될 수 있었다.[* 물론 낙관적 문제일 뿐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긴 했다. 당장 민주당 지지층 중 진보 성향을 끌여들인 [[통합진보당]]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심지어 [[진보신당]] 창당 후에도, [[정의당]](진보정의당) 재창당 뒤에도 '촛불당원'과 기존 당원의 성향 차이는 두고두고 분란 요소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 경선에서는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심상정]]을 제치고 권영길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권 후보가 진보 정당 운동의 상징이었던 15~16대 대선과 달리, 17대 대선 당내 경선에서 권영길은 NL 후보로 인식되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애초에는 본인들의 독자후보를 내서 경선을 치르는 것이 당시 NL 계열 정파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진보정당 진영의 대선후보 급 명망가는 전부 비NL 계열이었다. 당장 경선에 참가한 후보 3명이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이 모두 범 PD 계열이었다. NL이 아무리 조직력이 뛰어나더라도 [[김창현(1962)|김창현]](...)이나 그 아래 체급 후보로 이들을 경선에서 누르고 본선에 진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다보니 NL에서는 저 세 후보 중 그나마 가장 본인들과 가깝고 정파색이 옅던 권영길에게 접근, 조직적 지원을 매개로 경선과 본선에서 NL진영을 대변하여 선거를 치러줄 것을 밀약한 것이었다. 비NL 성향 당원들이 이런 전개를 방관하지만은 않았다. 1차 경선 당시부터 당원게시판(당게), [[진보누리]] 등 민주노동당 계열 웹에서 치열한 논쟁이 일었으나, NL의 조직력이 합세된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 겸 대선 2회 출마 경력이 있는 권영길의 명망은 굉장한 것이었다. 1차에서는 과반에 소폭 미달했으나, 심상정과 붙은 결선투표[* 셋 중 조직이 가장 취약한 노회찬이 1차에서 24.6%를 득표하며 낙마했다. 권영길은 그렇다치고 심상정도 당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최대주주였던 금속연맹 사무처장 출신이었기에, 권영길의 과반을 가까스로 저지(49.6)%하고 심상정 후보(26.1%)와 비슷한 득표를 한 것은 상당한 성과였다. 다만 이 경선은 노회찬 의원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 경선이었다(...)]에서 53:47로 심상정을 누르고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것. 권영길 자신이야 진보정당 운동의 대표 정치인이니 그렇다 치지만, 문제는 NL의 입맛에 맞는 대선 구호인 '''[[고려연방제|코리아연방]]'''이었다. 결국 당시 국민적인 관심 거리였던 경제 문제(부동산 폭등, 양극화 등)와는 상관없는 이 구호로 인해,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표도 얻지 못하면서 권영길 후보는 2002년 대선에서 얻은 3.9%보다도 못한 3.0%라는 득표율(5위)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17대 대선의 선거 구도 상 [[이명박]]의 당선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역대 민주당계 정당 최약체 대선후보(...) [[정동영]]과 [[대통합민주신당]]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된 후보, 제대로 된 정책으로 대선에 임했다면 10%, 아니 정동영을 넘어 진보정당 운동 사상 최초 2위 득표도 충분히 노려볼만 했다.[* 실제로 [[영국 노동당]]이 이런 과정을 거쳐 분열된 [[영국 자유당]]을 대체하며 양당 구도의 한 축으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오히려 민주노동당이 구태의연,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면서 여당에 실망한 개혁성향의 표는 외려 [[문국현]]이 상당수 가져갔고, [[무소속]]으로 나온 [[이회창]] 후보가 3위를 기록했다. 민주노동당 당원 입장에서는 잘 할 수 있는 선거를 석패도 아니고 참패를 당한 셈. 선출 과정도 이랬는데 NL 색깔 뚜렷한 선거 운동 과정은 물론 결과도 참담했으니, 당시 비NL 성향 당원, 지지자들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youtube(FHQ3wmLd6FY)] △2008년 2월 3일 당대회의 토론.[* [[민주노총]]의 기관지인 '노동과세계'에서 2월 3일 당대회 회의록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다만 분량이 길다보니 축약된 부분도 다소 있고 오탈자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 [[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3384|[취재기록 전문공개]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 [[심상정]]은 2월 3일의 당대회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회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최고위원을 지낸 [[이정미(정치인)|이정미]]였다. 당대회 부의장으로서 대의원대회 진행을 앞두고 있었다. 한동안 먼발치로 보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그는 무대 한쪽에서 울고 있었다. 그는 '[[자주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나는 그 울음의 의미를 이해했다. 예감했던 대로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는 끝내 당 혁신을 거부했다." 위 문장의 출처는 책 '당당한 아름다움'(심상정 지음, 도서출판 레디앙) 204p] 그리고 [[일심회 사건]]에서 드러난 종북문제, NL 계열 정파들의 패권주의 문제, 당내 경선의 대리 투표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싼 NL-PD의 해묵은 갈등이 폭발했고, 2008년 2월 3일 당대회에서 [[심상정]]이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자, 당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잔류파로 갈라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