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족문제연구소 (문단 편집) === 주요 인물 === *이돈명(전 이사장): 한국의 인권변호사. 1970~1980년대의 숱한 시국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불렸다. 조선대학교 총장, 한겨레신문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민변의 모태인 정법회를 조직하였다. * [[조문기]](전 이사장): 항일 독립운동가.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어용대회가 열린 부민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결행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친일 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신념으로 투신하였고, 1999년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에 전념하였다. 2006년 11월 골수종과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8년 2월 5일 사망하였다. *김병상(전 이사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민족문화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내며 반평생을 민주화·사회운동에 헌신한 천주교 신부로, 2020년 4월 25일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때인 2009년에는 임헌영 민문영 소장과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을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헌정했다. 정부는 사회적 약자 보호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4월 26일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 [[강만길]](명예 이사장): 고려대 명예교수. 20세기 대표 지식인 중 한 명인 원로 사학자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각종 글을 쓰면서 현실 비판적 지식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김대중 대통령 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을 지냈고, 노무현 대통령 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았다. 일부 논란이 있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제자인 이주천 교수는 강만길이 과거 [[6.25 전쟁]]을 "전쟁통일의 방식으로 실패한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30년 동안의 통치는 정통성이 없으며 반 민주정권으로 남북의 평화통일운동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511100012|#]] 다만 이주천 교수 또한 '위안부는 매춘부'[[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46745| ]], '5.18북한군 개입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325216?sid=104| ]] 등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가려 들어야 한다. 어쨌거나 상당한 고려대 명예교수에 오를만큼 인정받는 석학. *한상범(전 소장): 동국대 명예교수. 1961년부터 동국대에서 42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군사독재 시절 1964년 한일협정 반대, 1969년 3선 개헌 반대, 1972년 유신 반대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매년 30~40편에 달하는 인권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글쓰기와 행동 양쪽에서 활발한 현실 참여를 해왔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불교인권위원회 대표, 한국법학교수회 회장을 역임하며 일제 잔재 청산과 인권 개선에 앞장서 왔으며, 2004년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임헌영(소장):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문학평론가이다. 안동사범학교를 나온 이후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그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1974년 문학인 사건과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겪기도 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본명은 임준렬(任俊烈)이다. 이름 논란이 있는 인물인데 [[박헌영]]을 본 따 임헌영이라는 이름(혹은 필명)으로 바꿨다는 의혹이 있으나 사실무근이며 정작 본인은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이에 [[한겨레]] 신문의 최재봉 기자는 임헌영 등 문인들이 "필명을 둘러싼 고충"이 있다며 온갖 이름 논란이 횡행하는 세태를 지적하기도 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88034.html| ]] 1974년 '문인 간첩단 조작사건', 1979년 '남민전 사건' 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2018년 검찰은 재심청구를 통해 임헌영 등 '문인간첩단' 피해자들의 무죄를 인정했으며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사실 또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으며(2006년) 누명을 벗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21/0003445877?sid=102|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0148692?sid=102| ]] *강덕상(전 지도위원): 비판적인 역사의식으로 일본의 조선사 연구, 특히 근대사 연구의 초석을 쌓았다. 강덕상의 연구는 ‘조선사는 일본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거울이다’라는 말로 축약되며, ‘일본의 길모퉁이에는 반드시 조선이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재일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연구를 제시하였다. 강덕상이 말하는 ‘재일사학’의 본령은 ‘일본인이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역사, 가만히 두고 언급하지 않으려 한 숨겨진 역사’의 규명이다. *송기인(지도위원): 부산 민주화 세력의 정신적 지주로 불린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참여해 반독재 투쟁을 하였으며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1989년 8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이사장을 지냈다. 2005년, 400여 시민단체로 구성된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추천을 받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됐다. * [[리영희]](전 지도위원): 한국의 대표적 진보학자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육군 소령 예편) 국군 간부들이 군수물자와 돈을 빼돌린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 고위층의 부패와 타락을 생생하게 목격, 이후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5ㆍ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글을 외국 언론에 기고하는 등 군부정권에 반대하는 기사를 쓰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2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각각 4년간 해직됐다. 1977년 저서 '8억인과의 대화'에서 중국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복역했고,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 취재를 기획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됐다. 그는 사회비평가이자 사민주의를 토대로 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민주화에 투신하고 오랜기간 독재에 맞서 투쟁했다는 점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인정하고 있다. 2010년 그가 작고하자 한나라당은 "리 선생은 우리사회의 행동하는 지성의 표상으로 살아오신 분으로, 특히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 많은 지성인들에게 용기의 상징이었다. 평화, 민생, 민주를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803622?sid=100| ]] 물론 일각에서는 리영희가 [[북한]]과 [[중국]], [[베트남]]에 대해 칭찬하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은 모른체하며 과만 비판한다며 비난한다. * [[이이화]](전 지도위원): 역사학자. 민족사·민중사·생활사 중심의 한국사 기술에 열정을 쏟았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 인물을 재평가하는 작업 등을 통해 역사를 대중화하는 일에 힘써왔다. 아이들이 보기 쉬운 역사서적을 다수 집필하여 '역사 할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인물.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계간 〈역사비평〉 편집인, 서원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20년 타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후광학술상 수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