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제(레) (문단 편집) ==== 나라를 잃고 도망가다 ==== || [[파일:청나라로 망명한 여소통과 일행들.jpg|width=500]] || || 청나라로 도망간 민제 일행 || 손사의는 탕롱을 점령한 뒤부터 매일밤 음주와 향락을 즐겼으며,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응우옌반후에는 떠이선 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응에안에서 충분한 휴식과 정비를 가진 뒤 섣달그믐과 춘절 기간에 청나라군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다. 청나라군은 전혀 방비가 없었으므로 대패하였고, 손사의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청나라 경내로 도망쳐 돌아갔다. 민제 또한 사람을 시켜 황태후와 자신의 원자 레주이투옌(黎維詮)을 데리고 진남관(鎭南關)에서부터 청나라 경내로 도망쳐 들어가게 했고, 그들은 남녕(南寧)에 안치되었다. 후 레 왕조의 유신인 레주이안(黎維𥙔), 딘냐호아인(丁迓衡), 딘린전(丁令胤) 등도 잇달아 민제를 따라 남녕으로 도망쳤다. 민제의 동생 레주이찌(黎維祗)는 황비(皇妃) 응우옌티낌(阮氏金)을 보호하여 청나라로 달아날 준비를 하였으나 도로가 막혔고, 이에 뚜옌꽝에서 유신들을 규합해 떠이선 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레주이찌는 패배하고 사로잡혀 살해되었고, 응우옌티낌은 민간으로 유랑하였다. 손사의의 패전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건륭제]]는 크게 노하여 손사의를 양광총독의 직에서 파면한 뒤 복강안(福康安)이 대신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손사의]]를 북경으로 징소하여 대죄하게 했다. 건륭제는 복강안에게 명을 내려 아홉 성의 병마를 지휘 감독하게 하여 재차 베트남을 정벌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복강안은 떠이선 군이 강대함을 알았고, 군사를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응우옌반후에는 마침내 금화를 복강안, 화신에게 뇌물로 주고 비굴한 언사로 화친을 구하였다. 건륭제는 철병하자는 건의를 수용하고 응우옌반후에게 입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응우옌반후에는 부장을 자신처럼 가장시켜 북경에 보내 건륭제를 조현하게 했다. 건륭제는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안남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또한 두 차례나 황위를 잃은 민제에게는 하늘이 후 레 왕조를 포기하였다고 여겨 다시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복강안은 주연을 차리고 민제를 초대하였고, 민제에게 안남은 매우 덥고 때는 한여름이니 출정하기 적당치 못하다고 하였고,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면 즉시 출병하여 떠이선 왕조를 토벌할 것이고,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이 선봉에 서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동시에 민제에게 떠이선 왕조를 토벌할 때 응우옌반후에의 무리에게 드러나 암살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잠시 변발을 하고 청나라의 복장을 갖추기를 건의하였다. 민제는 이에 동의하고 제일 먼저 변발을 하고 의복을 바꾸었다. 유신들도 임금이 그렇게 한 것을 보고 분분히 변발을 하고 의복을 바꾸었다. 이는 사실상 복강안이 건륭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벌인 것이었고, 복강안은 안남으로 출병할 계획이 근본적으로 없었다. 레꾸인은 이를 좇지 않아 남녕에서 수감되었다. 복강안은 민제 일행을 기만하여 변발하고 의복을 바꾸게 한 뒤 건륭제에게 상주하여 민제가 이미 나라를 되찾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중국에서 편안히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건륭제는 상주를 접한 뒤 민제 일행을 북경으로 옮겨 거주하도록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