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병석(1858) (문단 편집) === 말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91053476000.jpg|width=100%]]}}} || || {{{#eccd7a '''1916년 8월 28일 모습.'''}}} || 1910년 [[한일합방]]에 찬성하여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고, 한일합병이 되자 54세의 나이에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李王職) 장관과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1912년 [[메이지 덴노]](明治)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표적인 조선인 대지주의 1명으로 꼽히었고 자본을 투자하여 모 회사 사장이니 고문이니 하는 직함을 가졌으나 현대 [[경제]]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재산상의 큰 손해를 입었다.[* 토지를 담보로 빌렸는지 [[저당권|저당]]잡힌 토지가 은행에 넘어갔다. 당시 언론은 이를 '토지 문서가 자기 집 문갑 속에 있지 않고 식산은행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익살맞게 표현했다.] '''고종 독살설의 핵심 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가 [[송병준]]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태왕'(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으나 고종이 수락하지 않자 이를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고 한다. 다만 송병준은 이에 대해 '윤덕영, 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밝혀 이의 진상이 명확하지는 않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13204|#]] 1933년 2월 기준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할 정도로 거부였는데는데, 당시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 봉급이 40~50원이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동시기 기준으로 윤덕영의 재산은 100만 원이었다고 한다. 1925년부터 1939년까지 15년간 중추원 고문을 하였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1940년 8월 6일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노년기에 [[민복기|차남]]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는 모습까지 보고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