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병석(1858) (문단 편집) === 이토 히로부미를 초빙하다 === 1905년 7월 일본국 시찰을 명령받고 일본에 가서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수여받는다. 그런데 시찰은 명목일 뿐 사실은 운동비 10만원을 가지고 가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 왕실의 최고 고문으로 초빙하려 교섭에 나섰던 것이다. 그가 이토 초빙에 나선 내막은 이러한데 표훈원 총재 민병석, 법부대신 [[민영기]](閔泳綺), 시종 원무관장 [[조동윤]](趙東潤) 등 20여 명은 장차 그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자 일본 제도 시찰을 도모하였다. 이 때 민병석이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비밀히 아뢰기를 "지금 일본 관리로서 [[한국]]에 와 있는 자들은 세력을 믿고 전횡하는 방자함이 극심하니 일본 원로 중 유명 인사인 이토를 초빙하여 경성에 있게 하면 가히 그런 일본 관리들의 사사로운 행동을 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몰래 일화 10만원을 민병석에게 주어 운동비로 삼게 하고 민영기, 조동윤, 중추원 찬의 [[민상호]](閔商鎬), 외부협판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제도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도쿄]]로 가게 했으며 민병석은 스스로 뜻을 얻었다 생각하고 도쿄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민병석은 1905년 12월 육군 부장에 올랐고 1906년에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겸 내대신, 제도국 총재, 제실재정회의 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7년 10월 대훈 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綬章)을 수여받기에 이른다. 또 정미사변을 피해 [[영친왕]], 이토 통감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가 1908년 그 공로로 서성대수장(瑞星大綬章)을 수여받았고 1909년 2월 친서를 봉정키 위해 특사로 일본에 가서 일본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는다. 결국 이토를 초빙한 공로가 이 3개의 훈장 수여로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었는데 그의 훈장 수여는 이토 초빙 외에도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공로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