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병석(1858) (문단 편집) === 민씨 척족의 거두 === [[여흥 민씨]] 가문으로 [[1858년]] 12월 12일 충남 회덕(懷德)[* 오늘날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에서 태어났는데 원래는 감찰공파 공조참의 민관식의 아들이지만 삼방파 민경식(閔敬植)[* 이 사람도 원래는 입암공파였다.]의 양자로 들어갔다.[* 민병석과 민경식은 실제로는 29촌 관계가 된다.] 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1880년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벼슬길을 시작하였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위험을 무릅쓰고 [[명성황후]]를 호위한 공로로 민씨 척족 중에서도 핵심에 끼기 시작했으며 이후 민씨 척족을 대표하여 탐학을 자행하였다. 1884년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도승지를 겸임하면서 [[갑신정변]] 이후에는 민응식(閔應植)과 상의하여 장은규(張殷奎)를 일본에 밀파해 망명 중인 [[김옥균]]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 전권 공사 웨베르가 경성에 있으면서 세력을 궁중에 부식시키려 하자 [[청나라]]는 보정부(保定府)에 구금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돌려보내 러시아 진출에 대비하려 하였고 흥선대원군은 또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명성황후에 대항하려 하였다. 민병석은 교묘히 정쟁의 와중을 피하여 약 2년 동안 칩거하다가 1888년 10월 다시 출현하여 예조참판에 임명되었고 11월에 규장각 직제학, 12월에 동지돈녕, 1889년 3월에 강화유수 겸 육영공원 판리를 거쳐 11월에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1894년까지 [[평양부]]에 머물렀는데 이 때 악화인 당오전을 무수히 발행하여 [[조병세]](趙秉世)의 탄핵을 받았다. 재직하는 수 년 동안 순량한 백성을 죄주고 재산을 박탈하여 서민들에게는 악귀처럼 공포의 대상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중에는 흥선대원군의 밀서를 받아 청나라의 장군[* 이때 [[엽지초]]가 지휘관이었다.]과 내통해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 때 조선군도 일본군 소속에 있었는데, 특히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의 군대는 일본군 소속이었다.] 1895년 초 [[원주시|원주]]에 유배되었다. [[삼국간섭]] 이후 다시 명성황후 세력이 살아나면서 사면되었고 민씨 척족들은 특히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비명횡사한 이후로는 급격히 세력이 쇠퇴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친러 세력이 정권을 잡자 [[이완용]]이 자기와 내외종 남매간이 되는지라 군부대신, 궁내부대신, 학부대신, 철도원 총재 등 요직에 기용되었다. 자신의 척족이 점차 쇠퇴하여 권력을 떨치지 못하던 당시에도 민병석은 궁내부대신의 위치에 앉아서 과거 자신이 압박하던 일본당과 악수하여 [[러일전쟁]] 이후에도 능히 시류를 타게 된다. 대한제국기에는 탁지부대신, 표훈원 부총재, [[원수부(대한제국)|원수부]] 검사국 총장, 헌병대 사령관 등의 요직 외에도 [[대한천일은행]], 종로직조사(鍾路織造社) 등의 회사 경영에도 참여한 대표적인 관료 자본가였다. 주마등같이 동요하는 파란중첩의 조선 정계에서 민병석은 한걸음도 위험하지 않게 시종일관 권세간에 처한 인물로서 처세술에 비범한 재간이 있었다.[* 일찍이 고종이 그를 평하기를 "민병석은 짐이 부르려고 할 때는 이미 와 있고 내칠려고 할 때는 이미 떠나 있다"라고 그의 원숙한 수완을 꿰뚫어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