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긍호 (문단 편집) == 생애 == 민긍호는 1865년 1월 1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민치봉(閔致鳳)과 어머니 [[원주 원씨]]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https://m.blog.naver.com/mmk0418/220538882098|#]] 1897년 군에 입대한 민긍호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군대 해산을 보게 된다. 이 무렵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과 장병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대한제국군 원주진위대 [[원사|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는 원주진위대의 병사들을 불러모아 봉기를 결의한다. 민긍호는 모인 장병들에게,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 해산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지휘하여 원주읍의 우편소, 경찰분견소 등을 공격해 장악한다. 또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일본군과 싸워 수십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내고 격퇴시켰고, 이에 일본군 본대가 보병 2개 중대와 공병 1개 소대로 구성된 진압부대를 파견했으나 주민들의 지원 하에 전투를 벌여 진압부대를 물리친다.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편제와 지휘체계가 잘 구성되어 있었고 [[이강년]] 등 다른 의병부대와도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등을 발판으로 70여차례의 전투에서 거의 승리하였다. 또 원주, 여주, 이천, 홍천, 충주 일대에서 100여회의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린다. 이러한 명성으로 13도 창의군이 형성되어 서울 진공작전을 펼칠 때에도 관동창의대장을 맡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1908년 2월 27일, 원주 강림 박달치에서 일본군과 밤새 전투하던 민긍호의 부대는 탄환이 바닥나면서 촌락이 점령당하고 민긍호도 붙잡힌다. 중간 지휘관들이 다음 밤에 바로 구출작전을 개시했고, "우리 대장 민씨는 있는 곳에서 소리 지르라!"고 외치며 죽기살기로 싸웠다. 놀란 일본군은 민긍호를 그 자리에서 사살한 뒤 퇴각, 2월 29일에 순국하고 만다. 1907년 8월 5일에 의병부대를 만든 민긍호는 순국하기 직전까지 7개월동안 100차례가 넘는 전투를 겪었다.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전투를 벌인 것과 마찬가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