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권당 (문단 편집) == 상세 == 당의 이념 및 목표는 민주정치의 완성, 복지경제의 완성, 도의사회의 건설, 정의사회의 구현, 평화적 민주통일 달성 등으로 정하였다. 김의택은 1981년 2월 실시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투표의 0.5%를 얻는데 그쳤다. 같은 해 3월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정수(1937)|김정수]]([[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임채홍]]([[경상남도]] [[거창군]]-[[함양군]]-[[산청군]]) 등 2명이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총재 김의택은 [[전국구]]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1983년 2월 김의택이 노환으로 별세하자 후임 [[총재]] 선출 문제로 내분이 있었다. 그 해 5월 [[전당대회]]에서 임채홍이 총재에 선출되었으나, 다시 내분이 발생하였다. 결국 지도체제는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임채홍은 총재직을 사임하였다. 1984년 6월 전당대회에서 최인영(崔寅泳)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다시 내분이 발생하여 다음 달인 7월 최인영이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였다. 그리하여 조기항(曺基沆)이 대표최고위원직무대행이 되었다. 얼마 뒤 조기항도 사임하고 1985년 1월 다시 [[김응조]](金應祚)가 대표최고위원직무대행이 되었다. 그 사이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권당 지구당위원장이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신한민주당]]으로 이탈하였다. 1985년 2월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1명의 당선자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당등록이 취소되고 당은 해체되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은커녕 12대 총선도 넘지 못한 경우는 5공의 수많은 관제야당 가운데서도 [[민주농민당]]과 함께 유이하다.[* 이 제도는 30여년 넘게 존속 하다가 2014년 [[헌법재판소]]가 득표율 미만 정당 해산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사라졌다.] ~~4년 전 사들였던 신민당의 '유산'에 대해서는 이렇다하게 전해지는 것이 없다~~[* 물론 이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의 정신적 계승은 [[신한민주당]]의 파란같은 부활로 충실하게 이뤄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