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추왕릉 (문단 편집) == 상세 == 높이 12.4m, 지름 56.7m의 타원형의 흙과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대릉원 내부 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무덤이다. 문헌 상에 기록된 김씨 첫 번째 왕으로서 [[경주 김씨]]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284년 10월에 승하해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릉원]]이라는 이름도 바로 여기서 따 온 것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14대 [[유례 이사금|유리왕]]조의 '미추왕 죽엽군' 편을 보면 유리왕 14년(297년) 이서국[* 이서고국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과 화양읍 일대에 위치한 [[진한]]의 소국이었다.]이 공격해왔을 때 미추왕릉에서 [[죽엽군|대나무를 귀에 꽂은 병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竹現陵), 죽장릉(竹長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미추왕릉 주위에는 작은 대나무 숲이 있다. '''하지만 이 고분이 진짜 미추 이사금의 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경주에 전해지는 [[왕릉(무덤)|왕릉]]들은 [[18세기]]에 경주 김씨와 박씨, 그리고 석씨 문중에서 임의로 비정한 것들이 태반이라...[* 조선 후기 정부에서 예우 차원으로 옛 신라 왕실 가문들에게 제향을 올릴 왕들의 능묘가 있으면 조상님들 모시는데 보태 쓰라고 토지를 하사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갑자기 경주 지역에 "~왕릉"이라고 불리는 고분들이 늘어났다. 문중들도 [[삼국사기]] 등에 남은 옛 기록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무열왕릉]] 등 일부 정보가 확실한 것을 제외하면 어느 산 동쪽이다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그쪽에 가서 보이는 왕릉 같은 큰 무덤이 있으면 때려맞히는 정도였다. 그나마 [[법흥왕]] 이후 왕들은 문헌자료에 왕릉의 위치가 어느 산의 동쪽이라느니 북쪽이라느니 하는 정도라도 쓰였지만, 그 이전 초기 임금들은 그 정도 힌트도 없다.] 그래서 경주의 [[신라왕릉]]들은 [[무열왕릉]], [[원성왕릉]], [[흥덕왕릉]], [[선덕여왕릉]] 등처럼 기록에 딱 맞아떨어지거나 [[경주 태종무열왕릉비|무열왕릉비]]처럼 [[비석]]이 일부라도 남은 몇몇 예외를 빼고 피장자가 확실하지 않은 능들은 이름 앞에 [[傳]](전할 전)을 붙여서 "그렇다 [[카더라]]"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이미 문중에서 어느 왕의 능이라고 믿고 제사를 지낸 역사도 수백 년이 지났기 때문인지, 일반적으로는 그냥 전 자를 빼고 '''미추왕릉''' 이라고만 부르는 쪽으로 굳어졌다.[* 고대 일본의 [[전방후원분]]들 역시 현재 무덤의 주인이 특정되었는데, 이 역시 신라왕릉들과 비슷하게 문헌자료를 토대로 후대에 지정한 것이다.] 아무튼 현대 학계는 이 미추왕릉을 진짜 미추왕의 무덤으로 추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대와 사람은 비록 달라도 어느 수장격 인물이 묻힌 왕릉급 무덤으로 여긴다. 인교동 119호와 [[황남대총]]의 사이에 있으며 인교동 119호분의 주인이 [[내물왕]]으로 추정된다고 볼 때 황남대총이 [[실성왕]] 혹은 [[눌지왕]]으로 추정되므로, 능원의 형성 과정을 참고하면 이곳도 왕릉은 맞는다고 추측한다. 물론 규모상으로도 기본적으로 봉황대, 서봉황대, 황남대총 다음으로 큰 고분이므로 왕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추가로 미추왕릉 정면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미추 이사금]], [[문무왕]],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현재 위치에는 [[1794년]]에 세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