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천왕 (문단 편집) === 왕권 강화 === 30년 동안 재위했으나, 애석하게도 미천왕의 내정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후술하겠지만, 삼국시대를 다룬 사서인 [[삼국사기]]가 미천왕본기부터 내용이 상당히 부실해지기 시작한다.] 다만 왕권이 강해진 시기였다고 추정은 가능하다. [[고국천왕]] 때에 도입된 부자상속제가 혼란기를 거쳐 이 시기에 제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추측이 있는데, 실제로 [[고국천왕]], [[산상왕]], [[중천왕]], [[서천왕]]대에는 왕족들의 반란이 연달아 터졌고, [[봉상왕]]의 경우 자기가 불안해서 숙부와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으나 미천왕 대부터 이러한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 [[장수왕]]과 [[문자명왕]]의 사례가 있지만 이건 장수왕의 아들이자 문자명왕의 아버지인 [[고조다]]가 장수왕보다 먼저 죽어서 문자명왕이 세습한 사례다.] 또한 [[을파소]] 이후 지속적으로 언급이 되던 [[국상]] 직위의 언급이 미천왕 대 [[창조리]] 이후로 없는 것을 봐도 역시 왕권이 강화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302년 경부터 국상 자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로 봐서 미천왕이 국상 벼슬 자체를 전격 폐지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로도 국상 벼슬은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즉 신라 시대 [[상대등]] 같이 제가회의를 이끌고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해오던 국상을 굳이 따로 두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고구려의 부총리급 직위인 좌보와 우보를 합친 게 국상이었는데, 국상 벼슬이 생긴 지 200여년 만에 국상 벼슬이 날라간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대대로]]와 [[막리지]]가 나올 때까지 국상에 비견될 벼슬이 나오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