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천왕 (문단 편집) === 왕위 등극 === 한편 봉상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폭정이 심화되었다. 지진과 서리, 우박, 가뭄 등이 잇달아 일어나며 흉년이 지속되고 백성들의 굶주림은 극에 달하였지만, 봉상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궁실을 더 사치스럽고 웅장하게 짓는 데에만 치중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자주 시정을 건의하였음에도 왕은 따르지 않았고, 국고는 더욱더 바닥나고 있었다. 298년 11월에는 사람을 시켜 을불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창조리]]가 간언하기를, "하늘의 재난이 거듭 닥쳐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살길을 잃어 장정들은 사방으로 떠돌고 늙은이와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지 않으시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몰아서 토목공사로 고달프게 하시니, 만 백성의 부모가 되신 뜻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리소서."라고 하였다. > >[[봉상왕|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仁)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는다면 충(忠)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분에 넘치는 국상의 자리에 있기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들의 칭송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가? 다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9년(300년) 8월조 [[https://db.history.go.kr/id/sg_017r_0050_0140|#]] 2년 후인 300년 8월 봉상왕은 궁궐을 수리하기 위해 온 나라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15세가 넘는 이들을 징발하였는데, 당시 백성들은 먹을 것이 모자라고 일이 괴로워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이에 국상 [[창조리]]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헤아리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여 궁궐 수리를 그만둘 것을 간하였지만, 봉상왕은 창조리가 자신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바라는 것이냐며 무시했다. 그럼에도 창조리가 뜻을 굽히지 않자 봉상왕은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 싶은가"라고 답하며 오히려 목숨을 위협했다.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고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을 물색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비류강 기슭에 이르렀을 때 한 사나이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비록 용모는 초췌했지만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기를,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하려고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셔서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고 하여, 국상이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 >소우 등이 말하기를, "지금의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어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으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니, 창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오맥(烏陌) 남쪽 집에 모시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원년(300년) 8월조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17r_0060_0010&types=r|#]] 참다 못한 창조리는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 물러 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는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조불과 소우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산과 들을 물색해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찾아오게 했다. 비류강 기슭에서 을불을 만난 이들은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애써 부인하는 을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창조리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300년 9월, 봉상왕이 후산(侯山) 북쪽에서 사냥을 하자 창조리를 비롯한 신하들도 같이 사냥터에 갔다.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하라"고 말한 뒤 머리에 쓰고 있던 관에 갈댓잎을 꽂았는데, 이에 모든 신하들이 그를 따라했다. 민심이 자신의 편임을 알게 된 창조리는 함께 [[반정]]을 일으켜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모셔다가 옥새와 인수를 바치어 즉위하게 했다. 봉상왕은 얼마 후 병사들로 포위된 [[감옥]]에서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살]]했다. 다만 을불은 태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즉위년 하반기에 자연 재해나 괴이한 현상이 연거푸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미천왕 즉위 직후의 불안정한 정국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아무리 봉상왕이 [[폭군]]으로 폐위되었어도 어쨌든 정상적으로 계승한 것은 아니었으니 정국이 혼란하거나 불안정한 상태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미천왕을 즉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국상 창조리, 조불, [[소우]] 등은 이후 《[[삼국사기]]》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창조리는 국상이었던 데다가 《삼국사기》에 개인 열전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인데도 미천왕 즉위 이후에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공신]]으로 대접받다가 머지 않아 사망했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라면 반정을 일으킬 당시에 이미 고령의 나이었기에 대업을 이룬 후 은퇴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반대로 정치적 혼란 와중에 제거되었거나 [[토사구팽]]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