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천왕 (문단 편집) === 비운의 유소년기 === 훗날 미천왕이 되는 을불은 [[서천왕]]의 차남 [[돌고]]의 아들로서 고위 왕족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292년 3월 백부 [[봉상왕]]이 왕권 강화를 빌미로 친족들을 경계하면서부터 그의 수난이 시작된다. 즉위 직후 [[숙신]]을 격파하며 영웅으로 떠오른 숙부 안국군 [[달가]]를 반역으로 몰아 처형함에 이어[* 이에 나라 사람들은 "안국군 달가가 없었더라면 양맥과 숙신의 난을 피하지 못했을텐데, 지금 그가 죽었으니 이젠 누구에게 의탁한단 말인가?"라며 눈물을 흘리었다고 전한다. 당시 봉상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이듬해 9월에는 친동생인 돌고까지 숙청해버렸고 이 때문에 드라마틱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아버지 돌고가 처형당하자 을불은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촌구석인 수실촌(水室村)으로 도망가 신분을 숨기고 [[음모(고구려)|음모]](陰牟)라는 부자의 집에 [[머슴]]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음모는 을불이 왕족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을불은 죽어라 고생만 해야 했다. 낮에는 땔나무를 해오며 잠시도 쉬지 못했고, 밤에는 주인집 연못의 [[개구리]][* 맹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삼국사기]]》 원문에서는 [[蛙]](개구리 와)라고 기록되었으므로 개구리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가 시끄러워 주인이 잠을 못 잔다고 들들 볶아 밤새 연못에 기와나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고된 머슴살이를 버티지 못하고, 1년만에 음모의 집에서 나와 [[소금]] 장수 [[재모]]와 만나 동업했다.[* 머슴살이 때 번 돈으로 장사 밑천을 댔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금 장수가 된 이후에도 불우한 생활은 매한가지였다.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마친 후에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놓은 뒤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 현대의 [[의주군]] 일대로 추정된다.]에서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하룻밤 묵었을 때 그 집의 노파는 한 번 공짜로 소금 1말을 얻어갔는데, 숙박비로 준 소금을 더 달라는 것을 을불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노파는 을불이 잠든 사이 소금 가마니에 몰래 신발을 집어넣었다. 이후 노파는 짐을 지고 길을 떠나는 을불을 쫓아와 가마니 속에서 신발을 찾아내고는 그를 관가에 도둑으로 신고했다. 을불은 이 때문에 도둑으로 몰리게 되었다. [[압록강]] 변의 재(宰)[* [[조선시대]]의 [[수령]]과 비슷한 직책으로 추정된다.]는 [[팔랑귀]]처럼 노파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려 현행 절도범 누명을 씌우고는 을불의 소금을 모조리 압수하고 신발 값으로 노파에게 준 뒤, [[태형]]을 내려 매를 친 다음 내쫓아 버렸다. 갖은 고생을 한 을불은 골병이 들어 몸이 야위고 옷차림도 남루해져서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 이런 처참한 몰골이었으니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국시대]] 초기임에도 '임금을 받는 [[머슴]]', '행상을 포함한 상업' 등의 생활상이 묘사되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이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조선 후기의 생활사라고 해도 믿어줄 정도이다. 사실 한반도의 경우 [[암염]]이 없어 해안가에서 소금을 생산해 내륙으로 운송해야 하는 소금 장수가 매우 일찍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3세기 중반 [[동천왕]] 대의 고구려에 대해 기록한 《[[삼국지(정사)|삼국지]]》 〈동이전〉에서도 "하층민들이 먼 곳에서 쌀, 생선, 소금 등을 운반해 귀족들에게 공급한다"고 전하여 소금 장수의 존재가 검증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