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주리(전함) (문단 편집) === 한국전쟁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주리는 8월 19일 UN군에 합류하기 위해 노포크에서 출항했다. 9월 14일 큐슈의 서쪽에서 UN군과 합류한 미주리는 바로 스미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미주리는 한국 영해에 진입한 최초의 미군 전함이 되었으며 UN군과 합류한 바로 다음 날인 15일 삼척 앞바다에서 삼척에 포격을 가했다. 이는 [[인천 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삼척에 상륙 전 사전포격을 가하는 것처럼 움직인 것이다. 이후 [[볼티모어급 중순양함|중순양함 헬레나]][* [[세인트루이스급 경순양함|경순양함 헬레나]]와는 다른 배이다.]와 구축함 두 척과 합류한 미주리는 미 8군의 진격을 지원하게 되었다. 미주리는 9월 19일 인천에 도착하였으며 10월 10일 제5순양함 전대장 히긴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10월 14일에는 사세보에 도착하여 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밸리 포지의 호위함으로 동해안에 있던 미주리는 10월 12일부터 26일까지 청진과 단천에 포격을 가했으며 그 뒤에는 원산을 포격했다. 12월 23일에는 흥남 앞바다에서 미군 제3보병사단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철수하는 것을 지원했다. 이른바 '''[[흥남 철수작전|흥남 철수]]'''다. 1951년 3월 19일까지 미주리는 항모 호위와 지원 포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요코스카]]로 물러나 3일 뒤인 3월 24일에 요코스카에 입항했다. 그리고 잠시간 임무에서 해제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훈련에 쓰이다가 오버홀을 다시 받고 1952년 10월 17일 요코스카로 돌아와 7함대 사령관 클라크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다시금 해상 포격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단천, 청진, 성진, 원산, 함흥, 흥남이 미주리의 타겟이었다. 이 임무는 1953년 1월 2일까지 지속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YvxZWOumJ8jcm2mN1BJo74DqzSJ1Ege0HnFOCH1EbRpQvjlbIQV7t_1QnaB1oOypGcFuPLvwTa4WyAteakRD37pVYThIswcS3ZCMQx4t1hdmSRwt_n1ZzkBqp_9M_4IZ2kvscw_kbKJDEOxQ7OE5A.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yngman and Francesca visited USS Missouri.jpg|width=100%]]}}} || || 1950년 10월, 16인치 함포로 [[청진]]을 포격하고 있는 미주리함. || 1951년 2월 3일, 미주리함을 방문한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 || 미주리는 1953년 1월 5일 사세보로 잠시 돌아갔다가 23일 영국 해군제독 가이 러셀의 방문을 받은 뒤 바로 다음 주부터 다시금 지원 포격에 나섰다. 원산, 단천, 흥남 등지를 두들기며 북한군의 동해안 보급선을 끊었다. 그러나 3월 6일 미주리의 함장 워너 러셀 대령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임무는 잠정 중단되었고 기함 임무도 2번함 뉴 저지에게 넘겼다. 미주리는 4월 7일 요코스카에서 출항하여 5월 6일 노포크로 귀항했다. 그리고 미주리의 한국전쟁은 그대로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