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주리(전함)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대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8jg7wsHDzs)]}}} || || 진수되는 미주리 || 취역 직후 각종 테스트와 관숙 항해를 거친 뒤 1944년 11월 11일에 노포크를 출항하여 18일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기함 임무를 맡기 위해 약간의 시설 개장을 거치고 12월 14일 출항하여 1945년 1월 13일에 캐롤라인 제도에 도착하여 드디어 태평양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현장에서 [[마크 미처]] 제독의 기함을 한동안 맡았다. 1월 27일에 TF 58에 소속되어 항모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격하였으며[* 에식스급 항공모함 렉싱턴의 태스크 그룹에 소속되었다.] 2월 16일에는 1942년 호넷에서 이함한 [[둘리틀 특공대]] 이후로 처음 일본을 공습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임무는 항모의 호위에 그쳤지만. 이후에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2월 19일부터 화력지원을 시작했다. TF 58이 울리시에 귀항한 이후로 이번에는 항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의 자매함인 그 [[요크타운급]] 1번함이 아니라 [[에식스급 항공모함]]이다.]을 따라 3월 14일 출격하여 18일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서 항모로 접근하는 적 항공기 4기를 격추하였다. 이후 항모 프랭클린이 일본군의 폭격으로 대파당하자 그를 호위하여 3월 22일까지 울리시 방면으로 동행하다가 귀환하여 [[오키나와 전투]]에 앞서 사전 포격에 나섰다. 4월 7일에는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를 포함한 일본 해군의 잔존부대가 접근하였으나 미주리가 나설 것도 없이 [[야마토급 전함/실전#s-9|함재기들의 공습으로 인해 어뢰로 격침되었다.]] 생존한 4척의 일본 구축함들은 사세보로 귀항했다. 4월 11일 미주리는 카미카제 공격을 당했다. [[파일:external/www.ibiblio.org/h62696.jpg]] 이 사진은 사진찍기가 취미였던 취사병이 적기가 [[가미카제]]를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달려나와 순간찍은 사진이다. 항공기는 이 장면 이후 왼쪽 날개가 함체에 부딪치며 기체가 갑판에 뒤집어진 채 추락했다고 한다. 항공기에 달려있던 폭탄 2발 전부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운좋게 불발했고, 이후 항공유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함 자체의 손상은 미미했고 화재도 금방 진압되었다.[* 원래 카미카제를 할 경우 저공비행으로 비행하다 적함에 근접하면 수직 급상승을 했다가 수직으로 냅다 쳐박는 방식이였다. 하지만 조종사가 초보 파일럿이라 "될 대로 되라지" 식으로 어리숙하게 들이받아 저 모양이 된 것.][* 왜 수직상승해서 수직으로 들이받아야하느냐면 전함의 장갑은 보통이 아니기때문이다. 전함의 측면 장갑은 수백kg짜리 포탄이 800m/s의 속도로 날아와 날카로운 포탄 끝으로 쑤셔박는것을 막아내는것을 상정하고 만든 물건이다. 거기에 미주리는 아이오와급 전함인데, 이 아이오와급 전함은 1톤짜리 포탄이 날아와도 막아내는 수준의 장갑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함의 장갑이면 현대의 초음속 전투기가 들이받는 상황이 아니면 뭐가 날아와도 다 막아냈을것이다. 그렇기에 측면이 아닌 수직으로 상승후 전함 측면의 장갑을 피해 장갑이 얇은 갑판위의 구조물에 들이받아 화재를 내는것을 목표로 했던것이다.] 상황이 수습되자 미주리의 함장은 카미카제 파일럿의 시신을 해군식 수장으로 엄숙하게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때 조종사의 두 동강난 시신에서 찢어진 욱일기를 발견하였는데, 함장은 승조원 몇 명을 골라서 꿰매라고 시킨 후 관과 함께 수장했다.] 승조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함장은 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차원에서 장례를 관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 당시 미주리의 함장은 [[과달카날 해전]]에서(1차 과달카날 해전) 중순양함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USS 샌 프란시스코의 함장이였던, 일본 함대와 교전하다가, [[기리시마(순양전함)|기리시마]], [[나가라급 경순양함|나가라]]와 다른 한척의 구축함의 포격에 샌 프란시스코의 함교가 피탄당해 '''전사한''' 다니엘 캘러헌의 '''동생''' 윌리엄 캘러헌이였다. 마음만 먹었다면 시체훼손도 할수 있었던 상황이였다. 여담으로 형의 이름이 명명된 [[플레처급 구축함]] USS 캘러핸(DD-792)은 미주리가 공격당했던 해안 인근에서 3달뒤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 당했고,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당한 마지막 연합군 함정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장례식은 미주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행했었던 장례식이라고 한다. 전후 함장은 조종사의 어머니와 만나서 많은 대화를 했다고 한다. 4월 17일 12마일 거리 밖에 있는 잠수함을 발견하여 대잠작전을 유도하였다. 결국 구축함과 경항모 바탄에 의해 일본 잠수함 이56이 격침되었다. 이 때까지로 미주리는 오키나와에서의 임무를 중단하고 기동부대에서 빠져나와 울리시로 귀항했다가 5월 18일 [[윌리엄 홀시]] 제독 휘하 3함대의 기함이 되어 오키나와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금 [[전투|포탄을 퍼부었다.]] 이후로 6월 2일부터 3일까지 큐슈의 일본 비행장을 타격하였다. 6월 5일에서 6일간 [[윌리엄 홀시]] 제독이 이후로도 두고 두고 까이는 [[코브라(태풍)#s-3|태풍]] 속 항해를 결행하였으나 미주리는 상부 구조물에 일부 손상을 입는 선에서 그쳐 중요한 부위의 손상은 피해갔다. 3함대는 8일에 다시 큐슈를 두들기다가 레이테 만으로 물러났다. 1945년 6월 13일 미주리는 레이테의 산 페드로에 도착하였다. 오키나와에서 지원작전을 편 지 3개월 만이었다. 7월 8일 일본을 향해 북쪽으로 항로를 잡고 7월 10일에 도쿄를 기습하었으며 7월 15일에는 수상함 최초로 일본 본토에 포격을 개시했다. 홋카이도의 무로란을 포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강철과 와니시 철공소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공해 합동 타격은 7월 25일까지 지속되었으며 미주리는 주로 도쿄를 직접 타격하는 항모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7월 말이 되면서 일본에게 영해란 개념이 거의 상실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8월에는 드디어 일본에서 원자탄이 터지면서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 [[광복절|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미주리는 점령함대 기함 임무를 일시적으로 1번함 아이오와에게 넘긴 뒤 29일 [[일본의 항복|항복 조인식장]]으로 쓰이기 위해 도쿄만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9월 2일 미주리의 함상[* 한쪽 다리를 절뚝 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와 항복 문서에 싸인을 하는 일본 측 인사는 A급 [[전범]]이자 외무대신인 [[시게미츠 마모루#s-3|시게미츠 마모루]]인데,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부상을 입어 당시에는 의족을 착용한 상태였다. 뉴스릴에서도 한국인 애국자에 의해 다리를 잃었다고 언급되었다.] 에서 전쟁이 끝났다. 5일에는 기함 임무를 사우스다코타에게 완전히 넘기고 괌에서 귀환병들을 태우고 본토로 돌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