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륵사 (문단 편집) == 구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mrtempleplan.jpg|width=100%]]}}}|| || 미륵사 가람배치도 || 가람 배치와 면적에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가람은 사찰, 사찰 건축물이 배치된 형식, 즉 탑이 1개가 있고 금당이 1개가 있으면 1탑 1금당식이라고 하는데, 미륵사는 다른 [[백제]]시대의 절들인 왕흥사나 정림사 등이 1탑 1금당인 것과는 달리 3탑 3금당식으로 건물들을 지었다. 정확히는 1탑 1금당을 나란히 3중으로 배치한 삼원식의 형태로, 문-탑-금당이 하나의 공간을 형성했다. 3군데 공간은 회랑으로 구분되지만 뒤편의 강당에 이르러서는 다시 합쳐진다. 이러한 배치는 왕이 용화산 밑 연못을 지나갈 때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는 창건설화와 연관 있는 듯하다.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보편적인 양식인 쌍탑식, 황룡사나 청암리사 등의 1탑 3금당식과는 달리 3탑 3금당식은 현재까지는 미륵사지가 유일하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고대가람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새롭고도 특수한 가람이다. 그동안 백제의 가람은 그동안 1탑 1금당이 일렬로 늘어선 것이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륵사가 새로운 형식을 따르는 가람으로 확인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미륵사지 가람배치를 보면, 북서 방향에 중원을 배치하여 남에서부터 중문, 좌우로 복도에 가까운 남회랑·목탑·금당을 배치하고, 주위는 동회랑·서회랑·북회랑으로 둘렀다. 미륵사에는 중앙에 목탑이, 동서 양쪽으로 석탑이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학자들이 처음에는 석탑을 7층짜리라고 추정했지만, 근처 동탑지에서 새로운 파편[* 노반: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의 한 부분]이 발견되어 9층이라고 설을 바꾸었다. 목탑의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지만 비율 등으로 봐서 석탑과 같은 9층이라고 추측한다. 중앙에 있는 탑이 양쪽의 쌍 석탑보다 층이 낮은 것은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목탑의 높이는 약 60 m 정도로 상당히 크고 높았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이나 석축 등이 제대로 남지 않아 많은 부분이 추측일 뿐이다. 아무튼 지금은 홀로 남은 [[석탑]]으로 유명하니… 세월이 무상하다. 석탑은 한반도에 석탑이 들어와 만든 초기 작품인 듯하다. [[목탑]]의 형태를 직설적으로 모방하여 과도기적인 원초적 형태라고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도입할 때는 일단 기존에 존재하던 재료나 방식으로 시도해 보는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파르테논 신전]]처럼 초기에 세워진 석조 건축물은 목조 건축의 구조를 장식으로 따라한 모습이 보인다. 이 미륵사지 석탑 이후에 세워진 한국의 석탑들은 계속 크기가 작아지며 독자적인 양식이 생겼다. 백제시기의 유물로 남은 또다른 석탑인 [[정림사]]지 석탑이 훨씬 작고, [[신라]]의 [[감은사]]지 [[석탑]]이 [[불국사]] 석탑으로 작아지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표현이 간결해지고 크기는 점점 작아진다. 그런데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의 조영 시기가 불확실하고, 백제 석탑은 이 둘밖에 제대로 남지 않았으므로 진짜 원초적인 형태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륵사지 석탑이 정말 그 당시 양식이었는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탑의 구체적인 형태과 내력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미륵사지의 두 석탑 중 동탑은 고증은 뒷전으로 미루고 2년 만에 올린 것이고, 서탑은 해체 작업을 하던 중에 개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백제시대의 원형을 추정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폈다. 이후 서탑을 복원하고 붕괴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외형 면에서는 동탑을 참고해야 했다. [[목탑]]은 [[신라]] [[황룡사]]와 비견할 만하다. 황룡사가 미륵사보다는 먼저 창건되었지만, 정작 얼굴마담인 황룡사 9층 [[목탑]]은 미륵사 창건 이후에 완성되었기에 미륵사가 창건할 때 목탑을 세웠다면, 미륵사 목탑이 더 먼저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백제의 [[아비지]]가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설을 도왔다는 기록을 보면 정황상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미륵사지 목탑은 황룡사 목탑의 [[프로토타입]]일 수가 있다는 것. 백제 장인들은 신라, [[일본]]까지 건너가서 건축물을 만들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인데, 일단은 미륵사 창건 당시에 신라에서도 인력이 파견되었다는 설화도 있으니 추측의 영역이다. 추후에 발굴조사를 하다가 목탑지 인근에서 기와를 잔뜩 발굴했는데, 대부분이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였고 8-9세기 이후 기와는 출토되지 않으므로 목탑의 소실시기를 짐작케 해 준다. 또한 목탑지 기단의 북쪽에서 1 ~ 1.5m 떨어진 곳에 기와가 일정한 선을 이룬 채 출토되었다. 목탑이 모종의 이유로 무너질 때 해당 방향으로 쓰러진 듯하다. 현재의 [[목탑]] 모형과 복원안은 [[https://youtu.be/ukO4Y7zNIIY?t=6594|2021년 미륵사 학술심포지엄 : 미륵사 복원고증 기본연구의 성과와 과제]] 참고. 5*5칸 평면규모, 동서 석탑과 동일하게 초반석과 장초석이 있는 구조, 약 31m 높이의 탑신, 9층 층방식의 하앙구조를 기준안으로 잡고 있다. 각 탑의 북편에는 금당[* [[불상]]을 모시는 건물] 격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 서쪽은 서원, 중앙은 중원이라고 삼원식 가람형태임을 알았다. '삼원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절이 3개가 모인 듯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는 미륵하생경을 기반으로 한 [[미륵]]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3회 설법을 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 금당의 터에서는 특이하게도 경주의 감은사지처럼 기단에서 지하 구조가 발견되었다. [[감은사지]]는 인근의 [[문무대왕릉]]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가 제시되었지만, 미륵사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으므로 조성한 이유 역시 모른다. 현재로서는 혹시 미륵불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구조가 아닌가 추측하는 정도일 뿐이다. 또는 [[서동요]]에 서동의 아버지가 용이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용 신앙과 관련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강당지와 승방지에서는 공통적으로 방들을 띄엄띄엄 두고 그 사이를 바깥과 안을 오갈 수 있는 복도로 사용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강당 자체에는 방 2개가 있었다고 확인했는데, 발굴조사 결과 방 크기가 계속 크기가 변했다고 추측한다. 강당의 양쪽에는 동서승방과 이어지는 접랑지가 있고, 북쪽 중간에는 북승방으로 연결되는 복도 시설의 초석이 남아있다. 면적은 부여 능산리사지의 금당보다 2배 가까이 넓지만, 광대한 면적에도 불구하고 석축이 잘 남아 연구에 편리했다. 승방은 강당의 좌우에 위치했던 동서승방과 강당 뒤편의 북승방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승방의 터에서 각각 2개 1조인 방이 4조씩 발견되었다. 또한 동승방 터에서는 불완전하긴 했지만 구들과 아궁이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도 [[도자기]], 불에 탄 곡식 등 여러 생활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남쪽에서 출토된 항아리들 중 하나에 미륵사 명문과 연도가 새겨져 유물들의 편년을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북쪽 기단 외부에서는 지붕 끝에 올리는 장식인 치미가 출토되어 승방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북승방은 미륵사지 내의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로, 구조는 동서승방과 비슷하며 방의 구성 방식 역시 똑같지만, 개수는 8개로 좀 더 많았다. 북승방지의 서편에서는 후대에 증축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승방과는 평면구조가 달랐다. 조사를 통해 발견한 물품들로 보아 이곳은 물건들을 만들던 공방 혹은 창고로 쓰였던 장소로 판단되었다. 그 외에도 남동쪽 모서리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쓰인 듯한 자그마한 우물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서승방지의 서쪽에서 발견된 공방지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조선시대 건물지가 있는데, 공방 유적은 인근의 왕궁리 유적이나 [[부여군]]의 능산리 사지에서도 발견되는 유적으로, 이곳 공방지의 숯 층에서는 동물 뼈와 쇠 찌꺼기가 발견되어 바깥에서 가져온 쇳덩어리를 녹여 도구를 만들던 곳이라고 추측한다. 이곳에서는 그 밖에도 기와, 토제 도가니 등 9세기경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건물지는 발굴 전에도 흔히들 '법당 밭'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건물을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유지되긴 했지만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금당과 중문, 부속건물의 터가 발견되었고, 명문 기와와 1500년대 후반의 백자 등 유물 등 여러 편이 출토되었다. 아마도 그 무렵 전성기를 맞고 1600년대 무렵 불이 나서 폐사가 되었다고 추정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