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륵사 (문단 편집) === 백제 이후 미륵사의 역사 === 창건 이후 미륵사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단편적인 사료들로 비추어 볼 때 통일신라,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초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에는 당간지주[* [[불교]] [[사찰]]에서 [[깃발]]의 일종인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지대로 쓰이는, 1쌍의 돌기둥 같은 구조물.]가 남아있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의 기법으로 보인다. 따라서 불교가 융성하던 통일신라 시기에도 미륵사는 꾸준하게 유지보수, 증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백제]] 출신 [[승려]] [[경흥]]을 나라의 어른(國老)으로 임명하는 등, 불교를 통해 백제 유민을 회유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인접한 익산 [[왕궁리 유적]]도 통일신라에서 사찰로 계속 운영되었다.] 신라 [[성덕왕]] 18년(719) 9월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고, 성덕왕 29년(730) 6월에 뇌진이 쳐서 '서쪽 석탑'이 반쯤 무너졌으므로 옛 모습대로 고쳐놓았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있다. "고려 [[왕건|태조]] 5년(922) [[고려]]의 [[승려]] 혜거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 하는 내용이 혜거국사 비문에 있다. 또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에 해당하는 명문이 있다. 기와의 연도는 그해에 새 기와로 보수했다는 흔적이다. 또한 미륵사지에서 [[고려청자]] 파편도 무수히 수습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도 사찰의 명맥은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이방원|태종]] 7년(1407)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을 정할 때 다른 사찰들과 함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이 때까지만 해도 사찰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 16세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 석탑 기록이 나오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 최대'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문구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석탑은 언급하되 절 자체를 두고는 말하지 않으므로, 빠르게 추정한다면 조선 초기에 지금과 비슷하게 석탑만 남고 사찰은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 이후 18세기 무렵 편찬된 와유록에 미륵사의 폐허를 보며 쓸쓸한 감정에 잠기는 사설시조가 있으므로, 조선 시대의 어느 시점에서 망한 듯하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도]] 내륙 지역에서도 [[남원성 전투]], [[웅치 전투]], [[이치 전투]] 등 큰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왜군]]이 익산까지는 침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병자호란]] 때에 익산은 교전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임진, 병자 양란으로 인한 소실 가능성은 낮다. 꼭 전란으로 소실된 게 아니라도 [[유교]] 국가를 표방하여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에서는 더 이상 지방의 대형 사찰 운영을 지원해주지 않았으므로, 수백년 동안 자연히 재정난으로 절이 문을 닫았을 수 있다. 특히 미륵사는 원래 백제의 국가 사찰로 만들었기 때문에 규모가 너무 커서 관리도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와유록에는 17세기 이전에 벼락에 의해 석탑이 무너졌다는 기록도 있지만, 기록과는 달리 석탑의 구조를 살펴본 결과 석탑의 1층 부분에서 구조에 이상이 생겨 상층부가 붕괴되었을 수 있다는 설이 나왔다. 또한 석탑을 지으면서 강도 보완을 위해 군데군데 흙을 채워 넣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 씻겨나가자 점점 탑이 흐트러지다가 무너졌으리란 설도 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미륵사 역시 재건되지 못하고 폐사지로 남아있었다. 절이 사라진 후에는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은 채 일대에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되었고, 그나마 남은 서탑의 반쪽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구조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조치라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다. 이후 1974년에 동탑의 터를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절터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는 동탑을 복원했지만 동서 양쪽의 탑의 형태가 똑같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고증 문제, 기계로 깎은 [[화강암]] 때문에 유적과의 이질감이 너무 커졌다는 재질 문제 등으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문화재를 이런 식으로 복원하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었다. 이후 그나마 남은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미륵사지 석탑이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11호, 미륵사지당간지주가 보물 제236호,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가 되었다. 1999년부터는 [[콘크리트]]로 범벅이 된 서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동탑을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작업은 매우 신중하게 이뤄졌는데[* 콘크리트를 뜯어내기 위해 [[치과]]용 도구까지 사용했을 정도라고 한다], 속도가 하도 느려서 2007년에는 혹시 비용을 횡령한 것은 아닌지 감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해체 작업은 2010년까지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동요]] 진위 여부 논란에 불을 지핀 금제사리봉영기 등 사리장엄이 심주석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해체와 조사가 완료된 후에는 붕괴 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지만 명확한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복원 과정에서도 층수나 형태를 두고 약간의 대립이 있었다. 기나긴 토론 끝에 복원 형태는 흔히들 알던 형태를 최대한 구현하기로 했고, 석재 역시 원래 있던 것들을 최대한 쓰기로 해 대략 80% 정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공사는 2015년 12월에 시작되었고, 당초 계획은 2017년 11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조금 연장되어 2018년 6월에 복원공사가 완료되었고, 그 후 주변 정리를 거쳐 이듬해 4월 30일에 준공식을 개최하였다. 미륵사지 정비와 서탑 복원 준비가 한창이던 2015년 7월, 미륵사지가 인근의 왕궁리 유적과 [[공주시]], [[부여군]]의 다른 백제시대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로 인해 미륵사지의 학술적 가치가 상승하였으며, 그 덕분인지 미륵사지의 한 켠에 있었던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2019년 초에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서탑이 복원공사에 들어갔을 때에는 복원이 완료되면 관광객의 유입이 늘어날 것이라 판단했는지 익산 관내를 비롯한 [[전라북도]] 서북부의 유물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바로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옛 전시관은 어린이박물관과 보존과학 시설로 바꿔 내년 개관하고, 장기적으로는 교육·문화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단지로 나아갈 계획이라고. 그 후 2020년 1월 10일, [[국립익산박물관]]이 새로운 건물에서 개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