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륵사 (문단 편집) === 서동과 무왕 === <[[서동요]]>의 서동 설화가 실제인지, 서동이 진짜 백제 무왕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답이 안 나오는 문제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백제 무왕이 서동이라는 것이 정설이었고, 7세기에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여러가지 새로운 정황이 나오면서 점점 서동이 실제 역사의 무왕이란 설은 정설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Mtemplescript01.jpg|width=100%]]}}}|| || 해체 중인 미륵사지 서탑의 기초. 가운데 있는 돌이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Mtemplescript04.jpg|width=100%]]}}}|| || 사리병과 금제사리봉영기[* 사리봉영기가 중앙에 있는 사리병의 남쪽에 놓였다. 즉 이 사진은 심주석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찍은 것이다.] || 미륵사지 서탑(서쪽의 석탑)을 해체하던 중 [[2009년]] 1월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 심초석(心礎石)은 탑의 중앙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심주석(心柱石)은 심초석 위에 올리는 돌 기둥이다. (물론 기둥이 나무라면 심주석은 없다.) 미륵사지 석탑은 심초석 위에 [[레고]]처럼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차곡차곡 올려 기둥을 만들었는데, 그중 심초석 바로 위에 있는 심주석에서 유물이 나왔다.] 안에 봉안된 사리병[* 부처의 유해에서 나왔다는 [[사리(불교)|사리]] 등을 담은 용기]과 금제사리봉영기, 구슬 등 사리장엄구[* [[불교]]에서는 사찰이나 법구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꾸민다는 의미로 장엄(莊嚴)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리장엄구란 '사리를 꾸미는 도구'란 뜻이다. 사리병 등도 당연히 사리장엄구이다.] 9900여 점이 나왔다. 학자들은 만약 유물이 나온다면 심초석에서 나오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심주석에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상당히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때 나온 유물 중 특히 주목받은 것이 바로 사리봉영기로, 금판에 음각하여 주칠(朱柒: 붉은 칠)한 글씨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록을 새겼다. 봉영기의 뒤편에 새긴 글씨에는 주칠이 대부분 사라졌다. 발굴팀은 아직 주칠한 글씨가 제대로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봉영기를 안에 넣어 봉안했고, 천수백 년 동안 습기에 시달리며 뒤편 글씨에 있던 안료가 녹아내렸다고 판단했으며, 녹아내린 안료는 사리공 바닥에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Mtemplescript.jpg|width=100%]]}}}|| ||<-2> 금제사리봉영기金制舍利奉迎記 원문 || ||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遶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乇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 (뒷면)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并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 ||<-2>가만히 생각하건대,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王宮)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舍利)[* 원문에선 유형(遺形)이라 하였는데 [[사리(불교)|사리]]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를 남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익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五色)(사리)으로 7번을 돌게 하였으니,[* [[불교]]에서 사리를 모신 탑을 예배하는 방법은 합장하고 탑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이다. 탑을 자기 오른쪽에 두고 3번을 돈다 하여 우요삼잡(右繞三匝), 줄여서 요잡(繞匝)이라고 한다. 사리 주변을 '돌게 했다'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단, 사리봉영기에서는 3번이 아니라 7번을 돈다고 하였다.] 그 신통변화(神通變化)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였다. 우리 백제왕후(百濟王后)는[* 번역문의 출처인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보고서는 이 부분에서 우리말 번역을 '황후'라 하였지만, 봉영기 원문은 王后가 분명하므로 '왕후'라고 바로잡는다. 다른 부분에서는 다 '왕후'라 하였는데 이상하게 여기서만 번역자가 '황후'라고 잘못 썼다.]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광겁曠劫]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승보(勝報)]를 받으셨다.[* 쉽게 말하면 '우리 왕후께선 까마득한 전생부터 공덕을 많이 쌓으신 덕에 현생에서 귀한 몸이 되셨다.'는 것이다.] (왕후께서는)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 삼보(三寶)란 [[불교]]의 3가지 귀의대상(불법승)을 가리키지만, 불교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쓰인다.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는 말은 '불교의 든든한 후원자/지지자가 되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적절하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대, 세세(世世)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겁겁(劫劫)]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위(王位[寶曆)][* 한자 원문은 보력(寶曆)인데 군주의 위, 또는 그 치세를 가리킨다. 문화재연구소의 보고서에선 보력을 풀어서 왕립(王位)이라고 옮겼는데, 왕위(王位)를 잘못 썼다고 판단하여 본 항목의 인용문에서는 바로잡는다.]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의 몸에 나아가서는,[* 원문은 왕후즉신(王后卽身)이다. 번역자는 [[동국대학교]] 사학과 김상현 교수인데, 김 교수조차도 즉신(卽身)이란 표현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번역문을 좀 뭉개었다. 김 교수의 글에 따르면 존칭어 당신(當身)이란 뜻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였지만 '몸에 나아가서는'이라고 옮겼다 하였다.] 마음은 수경(水鏡) 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를 영원(永遠)토록 다함께 복이(福利)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소서.|| ||<-2> 번역문 출처: 김상현, "금제사리봉영기",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59. || 봉영기 덕분에 미륵사는 백제 무왕 재위 기해년(639)에 창건되었음이 확실해졌다. 왕흥사와 달리 이쪽은 무왕의 재위와 일치한다. 게다가 [[법왕(백제)|법왕]]의 재위기간이 599년부터 600년이기 때문에 무왕이 대략 35년 이상 공사를 해서 639년에 세워졌다고 하면 말이 된다! 즉 [[삼국유사]]에 있는 [[충청남도]] [[부여군]] 왕흥사와 얽힌 기록은 잘못 섞이긴 했어도 익산 미륵사의 역사와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에 얽힌 기록이 문제가 된다. 일단 창건은 무왕이 한 것은 확실하지만 공사의 시작은 법왕이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되었다. 물론 법왕의 재위가 워낙 짧았기에 사실상 무왕의 의도대로 공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다분하니 큰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진짜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왕후다. 기록에 의하면 무왕이 미륵사를 세운 이유는 왕후가 사찰 창건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무왕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씨이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귀족 가문인 [[대성팔족]] 중 사택씨 가문의 인물로 후기 백제에서 왕후를 배출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고 추정한다. 이 정도 대형 사찰을 지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권력과 재산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사택왕후는 원래부터 백제 사람이기 때문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설화와는 맞지 않아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거짓일 가능성이 커졌다. 서동 설화가 단순한 [[픽션]]이었다고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불국사]] 창건 설화처럼 허구 속에 진실이 섞였을 수 있고 워낙 인기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다른 쪽으로 해석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무왕의 왕후가 2명 이상이 있었는데, 사택왕후는 [[선화공주]]가 일찍 죽고 새로 들어온 후처'라는 해석도 나왔다. 정실왕후 1명에 그 외는 모두 [[후궁]] 체제는 [[조선시대]]부터 정립된 것이고 고대에는 정실왕후가 여러 명인 사례도 많았다. 당시 왕의 결혼이란 곧 정치적 활동이기도 했음을 감안하여 여러 왕후를 두었다고 보더라도 크게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국내 안정을 위해 호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동시에 이웃 국가의 왕족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 역시 당대 기준으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 아무튼 서동이 무왕이라고 가정하면 '무왕의 왕후는 신라의 선화공주이거나 호족 사택 집안의 딸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고,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보는 것은 현대적인 결혼관을 바탕으로 당시 왕의 결혼을 이해하려 드는 오류일 수도 있다. 게다가 해당 발굴 결과 당시 미륵사의 구조가 (서동 설화를 소개한)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하고, 건설 시기도 무왕 연간임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무왕 및 서동, [[선화공주]] 관련 설화의 신빙성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보는 관점도 있는 터라 더욱 그렇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 또는 가정해 보자면,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짓기 시작한 사찰이 백제 내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 사택비의 공적으로 둔갑했다거나, 삼국 통일로 신라의 정통성이 확립된 시기의 인물인 일연이 사택비의 공적을 선화공주의 공적으로 흡수했을 수도 있다. 여하간,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사택비가 무왕의 왕후'라는 것이 '선화공주는 왕후가 아니다'라고 직결되지 않으므로 아직은 단정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사리봉영기가 발견됨으로써 선화공주설의 신빙성이 크게 낮아졌음은 사실이다. 또한 미륵사의 구조가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이 서동 설화의 신빙성을 높여주었다는 데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일연 및 해당 내용을 전한 사람들이 미륵사에 대한 정보를 오로지 서동 설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면 서동 설화 전체의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일연의 시대까지도 미륵사는 멀쩡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륵사 창건주에 대해서는 설명을 엉터리로 했다더라도, 미륵사의 구조에 대해서는 일연 당시 현존하는 미륵사의 형태를 보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한편 서동의 정체를 두고도 다양한 주장이 다시 떠올랐다. 아예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 5세기 [[동성왕]](479-501) 등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2016년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의 쌍릉 대왕묘 출토 유물들을 [[일본인]]들이 발굴한 지 99년 만에 재조사해보니 20대~40대 사이 여성의 치아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확인되었다. 무왕 시기에 신라 왕실 여인이 시집온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305033|#]] 하지만 신라 양식 토기는 당대 보편적이었고, 이것들이 꼭 신라산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반박이 곧장 제기되었다. 이후 [[무왕(백제)|무왕]]의 인골임이 판명되었다. [[무왕(백제)/생애]]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