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냐 (문단 편집) === 근대 === [[파일:미나역 이집트.jpg|width=800]] 20세기 초엽 건설된 미나 철도역. 고대 이집트 건물을 모방한 장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메흐메트 알리]]의 지배기에 미냐는 그 비옥한 토지와 생산량 덕에 중시되었다. 특히 미냐 주변에 목화와 사탕수수 농장을 소유하던 이스마일 파샤의 시기에는 더욱 중시되었다. 그는 미냐에 행궁을 세우고 1870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시에 대한 근대화에 착수하였고, 도시 확장이 개시되었다. 1873년에는 그가 소유한 농장의 관개를 위해 아시유트까지 이어지는 이브라히미야 운하가 개통되었고, 이로써 도시 서부가 더욱 발전하였다. 운하에는 여러 다리가 놓였고, 운하 양편으로 시가지가 확장하였다.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1879년에는 무슬림 페미니스트이자 이집트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후다 샤라위가 미냐에서 출생하였다. 한편 19세기 중반 터진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질과 양 모두 높았던 이집트의 목화의 가치는 크게 올랐다. 이로써 미냐에는 지주나 관리, 상인 출신 재력가 가문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도심 북부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설계한 고전/로코코 양식의 저택을 세워 부촌을 이루었다. 20세기 들어서도 미냐의 건설붐은 계속되었고, 카이로와의 철도 건설도 시작되었다. 그 무렵 목화 무역을 위한 영국 영사관이 세워졌고, 1907년에는 그 경제력을 확인하듯 오스만 은행의 지점 역시 들어섰다. 1927년에는 법원, 1931년에는 소방서, 1937년에는 시의회와 시청이 세워졌다. 도시의 중심은 기존 구도심에서 북쪽 신시가지에 놓인 넓은 신작로 방면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1952년 군부 '혁명'과 1956년 수에즈 위기로 국유화가 진행되며 미냐의 그리스, 아르메니아 공동체는 국외로 떠났다. 이로써 '식민 구역'은 구도심과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60년대 들어서는 공공 주택 정책의 일환으로 구도심에 밀집된 저소득층을 위한 도시 남부의 아르드 알 모울레드가 개발되었다. 한편 부촌은 기존 북부에서 더 위에 세워진 계획도시인 아르드 술탄으로 옮겨졌고, 특히 타하 후세인 (1889년 미냐 북쪽 50km의 마가다에서 출생) 거리가 그 중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