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군정 (문단 편집) === 미군정의 군사적 상황 === 원래 [[남한]]에 배치될 미군은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스틸웰 육군 대장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10군이었고 초기 계획에서는 하지 중장의 제24군단(예하 3개 보병사단)을 주력으로 야전군 직할로 공병, 전차, 방공여단, 전투지원 부대, 근무 부대가 배속되어 총합 11만명의 병력이 수송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병력 계획은 폐지됐고 무려 12번이나 계속 변경되었는데 그만큼 당시의 상황과 변수가 매우 유동적이었고 미군은 최초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게 명백했다. 가장 중요했던 3가지의 변수는 해군 선박의 부족, 소련군의 진격 상황, 종전 직후 바로 시작된 미군의 군축이다. 최종적으로는 미군의 선발대가 [[조선총독부]]의 항복과 [[서울특별시|서울]]을 접수하고 후속 부대가 지방 곳곳으로 배치될 때인 1945년 가을이 돼서야 확정되었는데 이 때쯤 되면 크게 축소되고 많이 달라진다. 먼저 남한 군정을 담당할 사령부가 10군에서 24군단으로 격하되었는데 미군 수뇌부에서는 원래 10군에 배속된 각종 부대들을 그대로 24군단으로 전환시켜 크게 증강된 군단급 부대로 기능 유지를 도모하려고 한 듯하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작전의 진행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린건지, 각지의 미군 부대를 싣고 수송할 해군 수송선단의 집결 및 도착이 계속 지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만주]] 지역에서의 [[소련]]군의 진격이 매우 빨라서 [[한반도]] 전체를 금방 석권할 조짐이 포착되자 미군은 일단 24군단 본부와 일부 직할대(제24군수지원사령부, 제1특별공병여단의 분견대) 휘하 1개 사단(제7사단) 등 2만 5천명의 병력을 1차 제대로 편성하여 9월 4일까지 승선을 완료하고 5일에 출항하여 8일에 [[인천광역시|인천]]에 도착했다. 선박의 부족으로 각 부대에 편제된 중무기, 중장비는 대부분 남겨둬서 거의 전부가 사실상 보병 차림이었는데 그들의 장비는 후속 선단이 싣고 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9월 15일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 원수는 하지에게 무전으로 훈령을 보내어 미국 본토에서 전시 동원의 해제가 진행 중이며 [[태평양]] 전구에서 가용한 점령군의 규모를 60만명 이하로 축소시켜야 하는 관점에서 점령 작전의 진행에 중장비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장비가 많은 부대를 점령군 부대 목록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하지는 오키나와에서 대기하던 군단 직할부대 중 3개 대공포대대와 1개 포병대대, 1개 전차대대와 제20기갑단 본부를 임시로 헌병 부대로 전환시켜 후발 제대로 남한으로 이동시켰고 떠나기 전에 부대들이 편제했던 중무기, 중장비와 관련 부속, 기자재들은 섬의 창고로 이관시켰다. 그외 다른 3개의 포병대대는 점령군 목록에서 지워졌고 잔여 방공, 기갑, 포병부대의 이동은 취소시켰다. 선발대로 남한에 온 제7사단 포병대는 야포를 가져왔지만 제24군단 포병대는 모든 야포를 오키나와에 두고 왔다. 1차 제대의 주력 부대인 제7사단은 [[태평양 전쟁]]에 1943년 4월 해외파병되어 북태평양 알류샨 열도의 에투 섬 전투를 시작으로 1944년 2월과 10월에 각각 마셜 제도의 남부 콰잘린 환초 전투와 [[필리핀]] 중부의 레이테 섬 전투(지상전)를 치뤘고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로 4개의 전역(Campaign)에 참전했다. 전쟁 기간 동안 총합 9,21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매 전투마다 계속 보충되었지만 그럼에도 사단에는 그간의 전투 경험이 누적된 다수의 베테랑 장병들이 많이 포진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최소 2차례 이상의 전역을 치뤘고 사단의 장병들 중 35%(5,200명)는 즉시 제대가 가능했던 전역 점수 85점 이상[* 2차대전에서 해외파병된 미군들은 점수제를 통해 전후 순차 전역하는데, 각종 복무 요소(복무기간, 해외파병기간, 훈장획득개수, 전역참가횟수 등)를 점수로 계량화하여 특정 점수를 획득한 장병을 제대시켜주는 것이었다. 종전까지는 전역 기준 점수는 대개 85점이었으나 전후 기준을 낮춰서 1945년 연말에는 일반적으로 장교와 사병은 각각 70, 50점과 또는 공통으로 복무 기간이 4년이면 귀향할 수 있었고 미국의 전시동원체제가 최종 해제된 1947년 6월까지 이 제도에 의한 소집 해제와 전역이 계속된다. 제7사단의 경우, 오키나와 전투 도중 5월에 사단의 최초 점수 획득자들이 본토로 돌아갔고 전투 종료 후 6~8월에 2번째 행렬, 사단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1945년 겨울부터 1946년 가을까지 다시 전역 장병의 전출 행렬이 이어진다.]을 획득한 상태였다. 그들은 제7사단보다 더 뛰어난 부대는 없다고 자부했는데 비록 전후 군축으로 훗날 한국 전쟁 초기의 미 7사단은 많이 열악했지만 이 당시만 해도 베테랑 사단이었다. 1945년 11월 1일경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77,000명으로 가장 최고치였지만 군축의 영향으로 감소하여 1946년 4월경에는 44,000명으로 감소했는데 그 직후 교대 병력의 도착으로 일시적으로 60,000명까지 증가했지만 1947년부터 군정 종료까지 3만명 정도로 유지된다. 상당수의 미군 장병들은 기준에 부합하는 전역 점수와 그에 상응하는 복무 기간을 이미 달성한 상태였고 군에 잔류하려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장교[* 확인된 사례로는 소령 계급 이하의 장교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배경상으로는 전쟁 전에는 생업이 있던 민간인이었고 전시임관으로 참전했던 이들이 대다수였던 집단이어서 그런 듯하다. 물론 중-대령과 장성들도 전후 전역을 택한 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나 본래 직업군인들 출신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적기는 하다. 전역이 결정된 장교들은 그들의 최후 보직에서 이임되어 개별적으로는 미국 본토로 복귀하는 장병 행렬에 편입되어 일시적으로 각급 인솔자가 되어 본토에서 전역 절차를 밟을 때까지 사병들을 관리했고 함께 전역했다.]와 사병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전역하여 집에 가고 싶어했다.[* 최근 기록으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5년 하반기에 전[[세계]] 곳곳에 파병되고 구 추축국의 점령군으로 있던 연합군 장병들([[미국]], [[영국]], [[호주]])의 일부가 연달아 시위를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각국의 국민 [[여론]]도 이에 호응해서 전시 동원을 빨리 해제하라고 정계에 압력을 가했고 그 영향으로 군축의 속도가 빨라진 점이 있다. 미군은 이에 점수제를 개편, 전역 기준을 낮춰갔고 46년 시점에선 파병기한을 최소 15개월을 채운 장병들이 (이들의 경우, 파병시작시점이 빨라도 44년 연말이며 전쟁 중 대규모 작전을 고작 1번 겪고 전쟁이 끝남) 기록상으론 46년 여름까지 전역했고, 전쟁 끝 시점에 배치된 전투경험이 아예 없는 보충 징집병도 47년에 전역했다.] 제7보병사단에서만 점수제의 완화된 기준에 힘입어 1945년 가을부터 1946년 중반까지 최소 7,500명 이상의 사단 장병들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대부분은 전역했다. 제7사단의 예하 연대(제17, 32, 184보병연대) 중 제184보병연대도 동원해제되어 1946년 1월 20일 제7사단의 부대 서열에서 방출되며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으로 복원갔고 대타로 태평양 전쟁 초기, 1942년 필리핀 방어전의 바탄 전투에서 소멸한 제31보병연대가 재창설되어 제7사단의 3번째 보병연대로 편제되었다. 기존의 184연대원들 중 점수미달 장병은 31연대로 편입되었으며 제31보병연대는 최초 창설부터 미국령 필리핀에 기반을 둔 현지 미군의 정규 전투부대로 필리핀 방어전에서 필리핀 군이 밀릴 때 전선의 소방수 역할을 담당했으나 바탄 전투의 암울한 상황과 맞물려 결국에는 항복했고 부대의 재창설에는 GHQ의 맥아더 원수가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31연대는 훗날 한국 전쟁의 장진호 전투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게 된다. 제24군단 휘하 사단들 중 먼저 제40사단이 철수했는데 40사단은 남한에 상륙한지 1달만에 전시 동원의 해제 예정을 통보받아 미 본토로 철수하여 원래의 역할이었던 주 방위군 사단으로 캘리포니아 주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1945년 겨울부터 6, 7사단에 담당 구역을 순차적으로 인계하고 1946년 2월 20일부터 사단 본대의 철수가 예정되었고 사단의 각급 부대에서 인원을 추려서 300명 규모로 사단 후발대가 편성되어 철수 전 행정 작업을 완료하고 3월 중순 철수한다. 그동안 1946년 연초부터 40사단의 장병들 중 전역 점수가 미달되는 장병들은 24군단 휘하의 다른 부대로 내보냈고[* 이것은 전후 해외 점령군으로 주둔 중인 미군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 인사 정책으로 현지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부대엔 부대 자체의 점수 고득점자 + 타 부대들의 고득점자들로 정원을 맞춰 귀국시켰고 점수가 낮은 장병들은 기존 부대에서 방출돼 점령군으로 잔류하는 부대에 남아서 점수를 마저 채우고 귀국하는 식으로 병력 및 부대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점령군의 많은 부대들은 현지에서 해산했고 부대 귀국 스케줄이 안맞을 땐 각지의 전역예정자이 특정 항구에 모여 귀국행 선박을 기다렸다.] 점수를 충족되어(45점) 전역을 희망하는 장병들은 일시적으로 사단에 편입되어 미 본토로 가는 철수 행렬에 합류했다.[* 주일미군의 경우, 제43보병사단 (뉴잉글랜드 주방위군) 이 45년 9월에 가장 먼저 귀국하는데 사단은 필리핀에서 점령군으로 9/13에 요코하마에 상륙했고 불과 2주가 지난 9/28에 일본을 출항, 미국으로 항해한다. 귀국 준비 당시에 사단엔 주일미군의 온갖 부대에서 가장 점수가 높았던 장병들이 전입왔다. 다른 예로 점령군으로 잔류해 6.25전쟁에 참전한 제1기병사단은 45년 7월부터 47년 여름까지 사단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 연 인원이 3만명을 넘었는데, 이 중 점수저점자의 비율이 많았을 것이다.]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주한 미군정의 전술 부대 중 최후로 철군한 부대는 제5보병연대 전투단으로 연대의 역사를 보면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8년 처음 창설된 유서깊은 부대인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39~1943년 시기에 [[파나마]] 운하 경비대로 주둔하다 미 본토에서 제71보병사단이 신설되면서 휘하 연대로 편제되었다. 연대는 1945년 1월에 [[유럽]] 전구로 파병되어 라인란트 전투를 겪었으며 이후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진격했고 그 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점령군으로 지내다 군축의 영향으로 1946년 11월에 해산되었다가 1949년 1월 1일에 한국에서 다시 창설되었다. 부대의 기간 장병과 장비는 [[일본]]으로 철수하던 제7보병사단에서 추려내어 편성했으며 미 군정의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후위대로 몇 달을 더 주둔했는데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는 신생 한국군이 질적으로 향상될 때까지 전쟁 억지력 차원에서 미군이 계속 주둔하기를 바랬지만 미군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내놓은 생색내기적 방안이었다. 제5보병연대는 1949년 6월 30일에 한국을 떠났으며 [[하와이]] 주둔군이 되어 지내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