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군 (문단 편집) ==== [[베트남 전쟁|베트남전]] ==== [[베트남 전쟁|베트남전]] 당시에는 [[소련]]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북베트남]]에 지상군을 진격시키지 못했으며, [[히로시마 원폭]] 시절과 달리 핵병기를 사용하기 힘들게 되는 등의 악조건으로 인해 결국 전쟁을 지리멸렬하게 끌다가 [[프랑스군]]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앞서 그랬던 것처럼]] 상처뿐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또한 이 당시까지도 징병제가 시행되어 적지 않은 미국인 젊은이들이 베트남에 끌려갔는데 전쟁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미군들이 희생되는 일이 늘어나자 젊은층을 중심으로 전쟁에 대한 반감이 거세졌고, 예산 부담 또한 늘어나서 경제에도 부담이 되는 바람에 확전을 주도한 존슨 대통령의 지지율이 폭락했고,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에서 슬슬 발을 빼면서 휴전을 했다가 최종적으로 북베트남이 승리하게 된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구방위대]] 미군은 북베트남을 철저하게 박살냈고, 테트 대공세 때는 각지에 숨어든 북베트남군에게 뒤통수를 강렬하게 후려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다시 전선을 밀어올리는 뚝심도 발휘했다. 베트남전은 전쟁 차원의 패배라기보다는 전쟁보다 고차원의 [[정치]] 레벨에서의 패배라고 봄이 옳다. 당시 [[구정 공세|테트 공세]]가 끝나고 수습 기간으로 들어갔을 때엔 [[남베트남]] 내의 민족해방전선(약칭 [[베트콩]])의 9할 정도가 증발해 버린 수준이었고, 미리 잠입해있던 북베트남 정규군도 적잖이 피해를 입었었다.[* 구정 공세 당시 1달이라는 기간 동안의 양측 사상자를 보면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3만명 이상이 전사했던데에 비해 미군은 2천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북베트남 수뇌부가 노린 것은 [[제1세계|서방]]의 [[언론]]에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서방 국민들에게 베트남은 느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곳이다!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그로인해 [[반전]] 정서를 불어오르게 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수단이 깔려있었던 것이었다. 이 당시에 미국이 징병제 국가였던데다가 북베트남을 직접적으로 멸망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수였다. 그 결과 안정적으로 진행되어가던 베트남 전쟁은 미국 내의 정치적인 문제로 철수하게 되고, 파리 평화 협정으로 전쟁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2년 뒤 이를 위반하고 남베트남을 재침공해 통일을 달성한다. 여담으로 [[크메르 루주]]가 1975년에 영해에서 미국 상선 마야궤호(마야구에즈호)를 나포해서 미국이 구출작전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난적 있다. 그런데 이런 크메르루주가 베트남과 전쟁을 하게 되니 이번에는 미국이 크메르 루주를 지원까지 했지만 결국 베트남의 공세에 크메르 루주 정권은 무너졌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7836&cid=42161&categoryId=4216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