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효세자 (문단 편집) == 여담 == * 정조가 손수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문효세자 탄생 관련 일화가 전한다. *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 처음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울면서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받을 수 없다며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정조)는 이를 느끼고 다시 재촉하지 않았다. 이후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널리 뽑았고, 다시 빈([[의빈 성씨]])에게 명하였으나 또 굳이 사양했다. 그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명을 따랐다. 저녁의 달에 임신하여 임인년 9월에 왕세자(문효세자)를 낳았다. 이에 소용으로 봉해지고, 오래지 않아 아들의 귀함에 의빈으로 품계가 올랐다. * 정조가 손수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문효 세자는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의 양자로 입적했는데 양육은 생모 [[의빈 성씨]]가 맡았다고 한다. 몽오 김종수의 [[몽오집]] 제7권 <문효세자지문>에는 문효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혜경궁 홍씨]]가 길렀다고 하며. 이재 황윤석의 [[이재난고]]에는 [[효의왕후]]가 양육하였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왕실 사람들이 손이 귀한 아들이라고 다들 아낀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조선 왕실에서는 공식적으로 원자의 보호와 양육을 하는 것은 보양청이지만, 사실상의 양육은 왕비와 유모, 보모 상궁이 한다고 한다. *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http://v.media.daum.net/v/20161230161602710|관련 기사]] *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비(御製碑)를 내렸다.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는 정조 자신이 쓴 것으로 사랑하는 문효세자를 잃고 슬픔에 괴로워하는 정조 자신의 심경을 서술했다. 이러한 정조의 애통한 심정은 비문 끝에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라고 한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세자 양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4달이 되어 빈렴하였으며, 또 발인하고 장사를 지냈다. 나는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도중에는 믿게 되었으니, 끝내 또 아득하여 꿈인 듯, 참이 아닌 듯하였다. 정을 둘 곳이 없어졌음을 의심하였고, 처지를 바꿀 수 없음을 믿게 되었으며, 이치를 알 수 없음에 아득하여 또 꿈인 듯, 참이 아닌 듯하였다. 만약 세자의 생이 달리 끝났다면 과연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겠는가. > >내 나이 30이 넘어 세자가 태어나서 3달 만에 원자로 정호하였고 3년이 지난 갑진년에는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2년 후 병오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태어난 임인년으로부터 겨우 5년 만이었다. 시호는 문효이며, 이해 윤월에 고양 율목동좌 임원에 장사지냈다. > >담당 관리가 돌을 준비하여 내게 고하였으나 지극한 슬픔에는 꾸밈이 없는 법인데 내 어찌 차마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늘이 내린 자질과 타고난 아름다움은 실로 바깥의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고 오직 나만이 아는 것이니, 또 어찌 차마 한 마디도 적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태어나던 날 저녁에 붉은 빛 한 줄기가 침실을 비추었으니 마치 해가 떠오르는 듯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백일도 되기 전에 능히 병풍 사이의 글자를 분별하였으며, 장난감 중에서는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오직 서책만을 매우 사랑하였으니, 그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천자문을 주고 빈료를 두고서도 개강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 일찍 철드는 것을 꺼려서였다. >일찍이 밤중에 방에 불이 났었는데 좌우에서는 자느라 알지 못하였으나 세자가 부르는 것을 듣고서 비로소 불이 난 것을 깨닫고 구할 수 있었으니, 이때가 태어난 지 한 해가 되기 전이었다. >미리 세자로 책봉하기로 한 것을 궁중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재촉하기를 장차 받을 것이 있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내린 운명이었으리라. > >병세가 위독해지자 소리 내어 나를 재차 불렀는데 내가 가서 보자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으니, 어찌 내게 작별을 고하려던 것이겠는가? 아마도 내가 구해주어 살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의 탄생이 늦는 것을 걱정하다가 다행히 그가 태어나는 경사를 맞았는데, 그가 탄생한 경사를 믿고 부모로서 자식이 병들까 걱정하는 마음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리저리 헤맨 끝에 구할 수 있는 약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영영 이별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때 아비가 된 것이 부끄러웠다. > >아! 시호를 내린 날 새벽에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데 홀연히 규삼에 공정책 차림으로 나타나 무릎 앞에서 작별을 고하기에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가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곧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니, 한바탕 꿈이었다. >살아서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죽어서는 꿈에 나타나 하직하였으니, 나를 사랑하고 사모하며, 나를 의지하고 그리워함이 그토록 지극하였다. 천성에서 우러난 착한 성품이 아니라면 어찌 어린 나이로 죽고 사는 즈음에 스스로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문효라는 시호조차 극히 일부분만을 드러내어 밝힐 뿐이다. > >아! 나는 바야흐로 처한 상황을 갑자기 믿을 수가 없어서 헛된 꿈일 뿐 참은 아니리라 의심하다가 다시금 꿈속의 꿈임을 깨달았으니, 달관한 사람더러 분별하게 하였더라도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참인가?’ 하였으리라. 이른바 참이라는 것도 반드시 참은 아니고, 꿈이라는 것도 반드시 꿈은 아닐 것이다. 원통하고 슬프도다. > >비명에 이르노니, 어렵게 얻었는데 빠르게 앗아감은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나는 물을 수도 없으니, 그의 병을 일찍부터 걱정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도다. 네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내가 보았으며, 네가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을 내가 들었다. 지난밤에 내게 어디를 간다며 고했던 것을 생각하니 캄캄하구나. 차마 바로 떠날 수 없었던 것인가? > >아! 국문으로부터 10리가 되지 않는 곳, 하늘이 내린 길지로써 효자를 길이 위로하노라. 내가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병오년의 초가을, 윤 모월 모일에 세우다. >---- >정조,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명》[[http://royal.aks.ac.kr/WH/Image?book_id=JSK_WH_25332&imgid=G002%2BJSK%2BKSM-WH.1786.1117-20150515.25332-1]] * 《조선왕조실록》의 정조대왕행장, "5월에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어 왕은 슬픈 생각에 겨를이 없는 처지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날마다 유사(有司)들을 단속하여 민간의 유행병 치료에 전력하게 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생명이 살아났다." * 정조는 문효세자를 얼마나 아꼈는지 문효세자가 죽은 해에 그 어머니였던 의빈 성씨마저 죽자 "죽은 문효세자가 이제 다시 태어나나 싶더니..."[* 의빈이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정조는 이것이 '죽은 아들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 내 아들로 돌아오는구나'라는 식의 생각을 했다는것.] 라는 내용의 글을 썼고 《어제의빈치제제문》에서는 의빈이 죽기 전 뱃속의 아이가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형제(문효세자와 뱃속의 아이)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는 등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이 진향문을 지었다. 정조 대의 문신 [[이성원]]의 개인 문집 [[조은집]]에 <문효세자만장>이 수록되어 있다. 조은집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 문효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의 앞길에는 본격적인 암운이 드리워지게 된다. 안그래도 아들 귀한 효종 가계에서, 서른 넘어 얻은 문효세자의 사후 정조가 다시 [[순조|후사]]를 보는데는 4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고, 과로로 인한 빠른 노화에 시달리고 있던 정조는 순조의 나이 11살 때 사망하면서 조선은 19세기 격동의 시대에 채 자질을 갖추진 못한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중간에 그나마 기대되던 [[효명세자]]가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정사에 손을 놔버린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에 나섰다가 과로로 의심되는 급사를 맞이했다.] 물론 문효세자가 글도 깨치기 전인 워낙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딱히 자질이고 뭐고 평가할 건덕지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정조의 통치를 눈으로 보고 겪으며 18살의 성인으로 성장해 즉위했을테니 적어도 신료 장악에 손을 놔버린 순조보다는 나았을 가능성이 크다. * 순조의 문집인 [[순재고]] 6권에 문희묘작헌례제문[[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1&fcs=&fcsd=&cf=&cd=&gb=&aa10up=kh2_je_a_vsu_40439_000&aa10no=kh2_je_a_vsu_40439_006&aa15no=006&aa20no=40439_006_0009&gnd1=&gnd2=&keywords=%E7%B4%94%E9%BD%8B%E7%A8%BF&rowcount=10|#]]과 효창묘친제제문[[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2&fcs=&fcsd=&cf=&cd=&gb=&aa10up=kh2_je_a_vsu_40439_000&aa10no=kh2_je_a_vsu_40439_006&aa15no=006&aa20no=40439_006_0016&gnd1=&gnd2=&keywords=%E7%B4%94%E9%BD%8B%E7%A8%BF&rowcount=10|#]]이 있다. * [[고종실록]] [[1870년]](고종 7년) [[10월 7일]], 효창묘(孝昌墓)에 나아가 전배(展拜, 임금이 궁월·종묘·문묘·능침에 참배)했다. * [[고종실록]] [[1870년]](고종 7년) [[12월 10일]],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 * [[1944년]]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